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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깨비같은 행복, 미꾸라지같은 행복
    ◑解憂所 2011. 11. 17. 06:56

     

    우리는 모두 행복해지려고 이렇게나 바쁘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 행복의 요체는 바로 '마음의 평온(安)'이라고 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우리 마음의 평온이 깨지고 불편해질까? 어떤 경우에 우리는 불행을 느끼게 될까?

     

    만약 경찰에게 체포당한다면, 그래서 감옥에를 가게 됐다면 불행해질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얘기가 있다. 어떤 남자가 하도 가난해서 잠 잘 데도 없고 끼니도 해결할 수 없어서 별 짓을 다해 보았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궁리끝에 도둑질을 하기로 했다. 현행범으로 체포돼서 감옥엘 가면 '최소한 먹고 자는 것만은 해결될 것이 아닌가' 기대를 하고 가게를 돌면서 물건을 훔치기 시작했다. 노골적으로... '제발 나 좀 신고해주쇼..' 하는 심정으로 도둑질을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남자의 딱한 사정을 알고 도대체 신고를 안하는 거였다. 남의 속도 모르고 말이다. 그래서 그 남자는 애를 태운다는 얘긴데.. 만약 그 남자 앞에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 수갑을 채운다면 그의 마음은 괴로울까? 감옥에 가게 됐을 때 마음의 평온이 깨질까? 아닐 것이다. 오히려 감옥에 가 들어앉아 있어야 편안할 것이다. 소설같다고 할 지 모르지만, 실제로 몇년 전에.. 어떤 실직가장이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이렇게 시달리며 사느니 차라리 감옥엘 가는 게 낫겠다'싶어 어설픈 은행강도짓을 해 체포를 자청한 사건이 있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생각해서 분명히 불행으로 떨구어 버릴 것 같은 감옥행이 때로는 오히려 바라는 바가 되어, 결코 그의 마음을 불행으로 밀쳐 넣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의 마음의 평온은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 만약에 의사가 '당신 지금 심각한 병에 걸렸소'라고 진단을 내린다면 마음의 평온이 깨지고 괴로워질까? 불행해질까?

    몇년 전인가.. 지독한 눈병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특히 학생들 사이에 전염이 심해서 눈병 걸린 학생들은 등교를 못하게 할 정도였는데.. 어떤 선생님이 자신도 눈병에 걸릴까봐 걱정이 돼서 인터넷에서 '눈병 예방법'을 알아보려고 검색을 하던 중, 신기한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지식in> 질문에 '어떻게 하면 눈병 빨리 걸리나요? 내공 왕창 드림'이라는 질문을 올려 놓은 거였다. 사연인즉 이렇다. 그 질문을 한 사람은 학생이었는데, 자기는 도저히 눈병에 걸리질 않아 고민이었다. 왜냐하면, 친구들은 눈병에 걸려서 학교도 안가고 집에서 '합법적으로' 잘 놀고 있는데 자기는 멀쩡해서 가기싫은 학교를 맨날 가야했다. 눈병 걸린 친구들한테 500원을 주고 눈꼽을 사서 문질러 보아도 이상하게 자긴 눈병이 안나는 거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나도 눈병에 걸려서 친구들하고 놀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지식in> 질문에 올렸던 것이다. 만약에 그 학생이 눈이 좀 근질근질해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선생님이 '얘야 큰일이구나, 눈병이 아주 심하게 걸렸구나' 라고 말한다고 해서, 괴로워할까? 불행하다고 생각할까? 아닐 것이다. 쾌재를 부를 것이다.

     

    그럼 죽음은 어떨까? 죽음이야말로 가장 큰 공포라 할 수 있다. 태어난 바 모든 생명체는 죽지않기 위한 경쟁에 전력투구한다. 병드는 것을 두려워하고 늙어가는 것을 싫어하는 것 역시, 따지고 보면 그 뒤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죽음을 피해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은 피할 수 없기에, 진정 공포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그런 공포스런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께서는 아주 평화로운 죽음을 보여 주셨다. 부처님 연세 80에 이르러 안거를 마무리 하시면서 죽음을 3개월 뒤로 정하시고 쿠시나가르로 가셨다. 마지막 날이 되어,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인근 사람들에게 알리라 하시고, 이윽고 밤이 되매 찾아온 대중들의 인사를 받으시고, 굳이 뵙겠다는 수밧다에게 몸소 법을 설하시어 최후의 제자로 받아들이신 후, 제자들에게 조목조목 유훈의 가르침을 내리시고, 오른편으로 사자처럼 누우시어 무여열반에 드셨으니.. 참으로 평화로운 죽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부처님뿐이 아니다. 역대 조사, 고승들 중에 평온하다 못해 신비할 정도의 죽음, 전혀 괴로움의 순간이 아닌, 그런 경지의 최후를 보여주신 분들이 수없이 많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좌탈(坐脫)이라 해서 앉은 자세로 죽음을 맞이하신 스님들이 많다. 우리는 감기몸살만 걸려도 꼼짝없이 드러누워 일어날 기력조차 잃어버리는데, 아무리 수행하여 도력이 높다한들 죽는 순간 그 고통이 엄청날 터인데, 어떻게 앉은 자세를 유지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참으로 대단한 경지가 아닐 수 없다.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 육신이라는 옷을 내려놓는 모습.. 요즘 웰다잉 얘기를 많이들 하지만 이보다 더한 웰다잉이 또 있을까? 그런데 그런 좌탈이 꼭 고승들만의 모습은 아니다. 재가신도중에서도 기도 많이 하시고 수행정진을 오래도록 하신 분들 중엔, 고승들 못지않게 선탈(蟬脫 매미가 허물벗듯 죽음)하시는 분들이 있다고 들었고, 실제로 내가 삼운사 근무할 때도 이와 유사한 실화를 들은 적이 있다. 이렇게, 분명히 고통의 극치요 불행의 대명사같은 죽음조차도 경우에 따라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불행하게 할 만한 경우들중에서 대표적인 것 몇개를 살펴보았는데 내가 하고싶은 말은, '이러이러한 것은 분명히 나를 불행하게 할거야'라고 예단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누군가는 불행을 느끼지만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 아니 오히려 더 행복해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행,불행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참으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도깨비같은 놈들이다.

    행,불행은 참으로 묘한 것이다. 분명히 '불행의 조건'이 될 것같은 상황들, 예를 들어 감옥, 중병, 죽음조차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불행의 올가미에 걸려들지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동안 살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행의 조건을 예단하고 무조건 거부하려고 몸부림치거나, 행복의 조건을 상정하고 그것을 향해 돌진해 간다. 마치 그것만 얻으면 곧 행복을 얻을 것처럼 말이다. 정말 우리의 생각대로 그런 조건들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가?

     

    사랑은 어떨까? 결혼은? 누구나 사랑에 빠져 행복한 인생을 꿈꾸며 결혼한다. 그런데, 여기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있다. 언젠가 TV프로에서 미국 위스콘신대학 교수님의 발표를 보았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미국인 수만명을 대상으로 '결혼 후 행복'에 관해 조사를 해보았더니, 결혼 당시에 피크를 치던 행복지수가 시간이 경과함에따라 점차 낮아지기 시작해서, 한 3~5년쯤 되니까 거의 제자리로 내려오더라는 것이다. 즉 결혼에의한 행복감이 5년을 못가더라는 연구발표였다. 그러면 배우자가 사망했을 경우, 그 불행의 정도는 어떨까? 이것도 조사를 해보았더니, 배우자가 사망할 때 불행을 느끼는 정도가 피크였고 점차 회복되어 2~3년쯤 지나면 거의 원상회복된다는 데이터를 보여주었다. 보통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장미빛 환상에 비하면 너무나 실망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으나, 실증적인 결론이다. 물론 우리나라와 미국의 사회문화적인 정서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결혼은 그렇다치고, 그럼 돈은 어떨까? 돈이야말로 확실하게 행복을 담보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닐까? 그 교수님은, 돈과 행복의 상관성을 알아보기위한 자료로써, 수십년 동안 미국의 국민소득 추이와 '행복을 느끼는 미국인 비중'과의 추이를 비교한 그래프를 제시하였다. 그런데 그 기간중에 국민소득 곡선은 계속 상승추세였는데 비해, 행복을 느끼는 국민비중은 오히려 완만한 하향추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국민소득이 높아지면 더 행복해질 것같은, 돈이 많으면 더 행복해질 것같은 게 일반적인 기대임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다소 뜻밖으로 나온 것이다. 이 연구결과에서뿐 아니라 가끔 신문이나 방송에 보도되는 바에 의하면, 세계 각국의 행복지수를 조사해보면, 행복지수는 결코 국민소득 순(順)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우리가 '잘 사는 나라'라고 하면, 보통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그런 나라를 선진국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나라들일수록 소위 '못사는 나라'에 비해, 이혼률과 자살률이 높고 우울증 비중도 높다고 한다. 어떻게 그런 나라를 '잘 사는 나라'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부유한 나라는 될지언정 '잘 산다'라고 부르기는 곤란하다.

     

    한 나라의 소득이 높아짐에따라 그 나라의 사회상도 변화하게 되는데, 어느 일본학자가 이런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국민소득이 5천불을 넘어서는 단계에서는 사촌이상 친척들과 멀어지게 되고, 1만불을 넘어서는 단계에선 부모가 귀찮아지고, 만오천불에서 2만불정도 되면 자식이 부담스러워지며 (그래서 아마도 요즘 우리나라 출산률이 저조한가보다), 3만불정도 되면 부부가 서로 속이며 살게된다는 것이었다. 소득이 높아지는만큼 경쟁도 치열해지고 각박해져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는 소치이겠지만, 참으로 씁쓸한 얘기이다.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 와중에 개인은 점점 더 소외되고, 가정은 파괴되고 사회는 오염될 수 밖에 없는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더 행복해지려고 문명을 발달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인데, 어찌하여 결과는 거꾸로만 가고 있는지.. 고민해 볼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같이, 우리가 생각하기에 분명히 행복의 결정적인 조건인 것 같아보이는 사랑, 그리고 돈조차도 사실은 완전한 필요충분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나 결혼, 경제적 풍요가 행복에 기여하는 부분까지 완전히 부정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 다만 그것에만 의존하여 행복을 추구한다면, 무지개를 잡아 옷을 해입으려는 것과 같다는 점을 지적하고싶을 뿐이다. 그래서, '결혼은 행복의 문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둘이서 행복의 집을 짓기 시작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결혼이라는 관계설정이 곧 행복을 수반하는 게 아니라, 부부간에 사랑을 가꾸어 나가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교훈이다. 또 재산에 관해선, '백석을 하는 사람은 백가지 근심, 만석을 하는 사람은 만가지 근심'이라는 말이 있다. 재물의 풍요가 육신의 편안함을 제공할지는 모르지만 정신적인 안락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돈이 좋다고는 하지만, 갑자기 생긴 엄청난 돈이거나 주체하기 어려운 재물은 복이 아니라 화를 부르는 경우도 많다. 인생역전이라는 로또 당첨 이후 소송에 휘말리거나 가정이 깨지거나 신변에 위협을 받는 등, 오히려 불행해졌다는 뉴스도 몇번 보았다. 

     

    비단 결혼이나 돈뿐만이 아니다. 명예나 인기, 권력도 마찬가지이다. 영원하지도 않고, 전능(全能)하지도 않다는 속성을 명심해야 한다. 그 사실을 잊고 거기에 온통 의지하다보면 크게 휘둘리게 되고 상처받게 된다. 그것들의 노예가 되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 속성을 잘 알고 임한다면 오히려 더 멋진 사랑, 더 멋진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있고, 돈도 정당하게 벌어 멋지게 쓸 줄 알게 되고, 인기에 얽매여 정신 못차리는 우를 범하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그것들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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