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천암 가는 길에 건너가는 '이 뭣고' 다리.
북천암(福泉庵)은 문장대로 올라가는 길가에 있다. 울긋불긋한 옷차림을 한 등산객들
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다.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뭣고'라는 다리를
만난다. 마치 옛 친구를 만난 듯이 사뭇 반갑다. 내가 이 다리를 처음 본 것이 아마도 15
년쯤 되었으리라. 다리는 그동안 얼마나 성성하게 '이뭣고?'라는 화두를 참구했을까.
'이뭣고'라는 화두는 철벽으로 꽉 막힌 삶이라는 일물(一物)에 시원한 구멍을 뚫기 위한
송곳이다. 그러나 난 꽉 막힌 삶에 길들여져 구멍을 뚫지 않아도 별 불편을 느끼지 못한
채 여전히 두루뭉술하게 세상을 살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화상이 아닌가. 이윽고 복천
암 입구에 닿으니 족히 3, 4백 년은 됐음직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마치 사
천왕 중의 한 분처럼 당당한 체구로 암자 입구를 지키고 섰다.
▲ 복천암 전경.
▲ 복천선원.
▲ 선원 앞을 지키고 있는 주목.
복천암 선원은 금강산 마하연, 지리산 칠불암과 더불어 구한말 3대 선방 가운데 하나로
꼽히던 곳이다. 동산 스님, 성철 스님, 고암 스님 등 내로라하는 선승들이 모두 몇 철씩
머물다 갈 정도롤 선수행으로 이름난 암자다. 선원 뜰 앞에는 상당히 밑동이 굵은 주목
한 그루가 서 있다. 태백산이나 소백산 주목 가운데 가장 큰 나무와 맞먹을 정도로 굵은
나무다. 이곳에서 꽤 오랜 세월을 머무르면서 숱한 선객들을 지켜보았을 산 증인이다.
▲ 수각(水閣)과 장독대. 맞배지붕 형태의 수각을 지어 샘을 보고하고 있다.
선원 뒤 극락전으로 가려면 수각(水閣) 앞을 지나야 한다. 300여년 전, 선비 정시한이
기이하다고 했던 그 샘물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 바로 수각이다. 복천암이란 암
자 이름도 이 샘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선 세조가 복천암에 머물면서 피부병을 치료했
다는 얘기도 필시 이 샘과 연관이 있을 터. 세조가 병을 고침으로써 복천암이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일까, 아니면 명성을 듣고 나서 세조가 찾아온 것일까. 혹 맑고 담백한 물
맛을 가진 샘을 암자를 대표하는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울 줄 아는 상재(商才)를 가진
스님이라도 있었던 것인가.
▲ 극락보전.
▲ 극락보전 좌측에 있는 산신각.
복천암은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극락전을 중심으로 선원과 요사가 있는 남
쪽 영역과 나한전과 요사가 있는 북쪽 영역으로. '속리산복천암선원복원기념비'
는 극락전과 나한전을 1976년에 복원했다고 적고 있다. 산신각도 극락보전과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 산신각 탱화에 적힌 화기(畵記)에 그렇게 적혀 있다. 극
락보전은 복천선원 뒤편 높은 축대 위에 있다. 극락보전은 정말이지 손바닥만한
마당도 없다. 부족한 공간을 축대를 쌓아 넓혀서 건물을 짓다 보니 마당을 둔다
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 했을 것이다.
▲ 나한전.
▲ 나한전 요사.
산신각 옆으로 난 문을 나가서 오솔길을 조금만 걸어가면 나한전 영역에 닿는다. 나한
전 요사는 본래 선원을 옮길 생각으로 신축한 건물이라 한다. 그러나 무슨 사연이 있었
는지 예전 선원을 계속 사용하기로 함으로써 그냥 요사로만 쓰이고 있다. 나한전은 요
사 뒤에 높게 쌓은 축대에 자리 잡고 있다.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된 건물이다. 중앙에
는 석가모니불을 봉안했고, 좌우로 8구씩 모두 십육나한을 모셨다. 극락전 영역보다는
이곳이 훨씬 더 아늑하게 느껴진다.
▲ 입구의 채소밭.
다시 극락전 영역으로 돌아와 복천암을 나선다. 암자 앞에는 텃밭이 있고 그곳엔 배추
와 고추가 심어져 있다. 선승들의 노동은 곧 수행의 일환이다. '백장청규'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一日不食)’이라 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도 말라"는 뜻
이다.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
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날 농사꾼
아우가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
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
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정진규 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일부
올해는 정말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까울 만큼 비 내리는 날이 많은 해였다. 놀고 있는 햇
볕도 아깝거늘, 하물며 놀고 있는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선가의 오랜 가풍인
선농일치가 이곳에서만이라도 활짝 꽃피었으면 좋겠다. 부디 기복신앙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복천암이 아니라 스스로 복을 일구는 복전암(福田庵)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