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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다(自作自受)
    ♥일상사 2013. 11. 29. 11:17

     

    세계는 감정이 있는 물질(유정물), 감정이 없는 물질(무정물) 움직임이 거의 없는 물질(식물), 움직여 돌아다니는 물질(동물)들이 부단히 생성되고 소멸되면서 그렇게 생긴대로 스스로 그러하게(自然) 생겨나고 사라져 간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감정, 물질, 정신을 이루는 세계도 부단히 생성되고 소멸된다.

    생겨난 것들(주체,正報)이 그를 받쳐주는 일체의 조건들(依報)에 더하여 자기 닮은 것들을 생겨나게 하고 자기로 인해 인식되고 생겨난 것들(감정, 물질, 정신, 이성, 이념, 지식, 지성, 사유, 철학, 종교 내지 세계, 기, 에테르, 영혼...)에 기대서 살다가 자신이 가장 먼저 사라지고, 자신을 따라서 생겨난 것들도 사라져간다.

    이것이 모든 생명들의 실상이다. 아이들이 모래사장에서 한바탕 집짓기 놀이를 하다 허물고 집으로 돌아가듯. 다만 생명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바탕 집을 짓는 일 뿐이다.

    신과 대아, 진아, 영혼, 에테르, 기(氣), 천국, 극락, 가지가지 세우고 기대보지만, 결국 제가 지고 제가 받는 것(自作自受) 말고 기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기댈 것은 없다.

    아무 것도 세울 것은 없다.

    인간의 업을 타고난 인간이 산출한 모든 것은 다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으로 이해한 신, 인간적으로 이해한 진아, 인간적으로 이해한 세계와 우주....

    그것은 개미가 되 보지 않고 개미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개미적 세계관에 의해 펼쳐진 세계를 인간은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관찰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관계할수 있지만 다 알 수는 없다. 인간끼리도 마찬가지며 심지어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다만 인간으로서 살다가 인간으로서 갈 뿐이다. 우리가 겪는 모든 현상들은 인간이라는 범주의 속성을 반영한다. 인간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한 인간 속성 또한 최종적으로 정의될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의 통계가 있을 뿐이다.

    인간은 움직여 돌아다니며 느끼고 생각하는 물질이다. 물질과 감정과 정신, 이 셋 중 하나라도 없으면 제 기능은 작동 불가하다. 이들은 분리되지 않는 하나다.

    이들이 분리되는 것은 인식의 차원에서다.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감정계), 색계(물질계), 무색계(정신계)가 그것이다. 이것들은 실제로 분리 불가능하게 서로 융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수행을 통해 감정의 차원(欲界)을 극복하고 인간이 자신을 물질적 존재(色界)로 인식할 때 감정은 작동을 멈추고 물질화되며 감정이 배제된 인식에서 모든 존재는 절대평등하다. 우리가 차별 없이 허공을 바라보듯이. 그것이 제4의 선정이다. 이때 무차별의 순수 정신세계(無色界)가 나타나며 절대평등성을 획득한 공무변처(空無邊處)로 나타난다. 이 공(空)한 절대평등처에서 다시 인식된 세계는 이성과 지성의 극치인 식무변처(識無邊處)이며, 차별 분별을 떠난 세계인식이다. 차별이 없으니 소유할 것도 없다(無所有處). 생각 유무의 범주도 떠나 있다(非想非非想處).

    붓다는 인간 인식의 극치인 이 지고(至高)의 인식마저 버리라고 주문한다. 여기에는 아무 것도 잡을 것이 없지만, 지고의 인식이라는 기댈 것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고의 인식에 하나님을 세우고 진아를 세우고 주인공을 세운다. 무엇이라도 세우려한다. 지푸라기라도 세운다. 마을 어귀에 장승을 세우는 것에서부터 인간은 세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운 것은 다 사라져간다. 인간도 인간이 세운 것도 다 사라져 간다.

    금생에만도 얼마나 많은 감정과 물질과 기억과 인식들이 사라져갔는가?

    인식이 사라진 자리엔 몸이라는 물질도 시공도 사라진다. 몸이 없다면 인식행위도 없다. 그래서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닌 하나이다. 그것이 물질과 정신이 하나로 병들지 않은 상태이다. 물질(몸)과 정신이 둘일 때 파괴가 시작된다.

    자신의 일을 자신이 가장 잘 알겠는가? 하느님이 가장 잘 알겠는가?

    이것이 자신을 등불로 삼아야하는 이유이다.

    인간에겐 인간의 역사가 지어온 공업(共業)의 역사도 있다.

    이것이 법(法), 양심을 등불로 삼아야하는 이유이다.

    제가 짓고 제가 받으며 양심껏 사유 관찰 통찰할 뿐이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부처다 하며 나를 세워도 어긋난다.

    붓다는 신을 세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을 세우지도 않았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지금 여기 맑고 밝은 법으로

    자기가 짓고 자기가 책임지며 도리로 행하는 것, 그것이 자유 평등 해탈이다.

    이 또한 무상(無常)의 법칙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니 살아있는 지금이 소중하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과거의 업인(業因)에 의해 갚아진 국토, 가옥, 옷, 음식물 등의 세간(世間)은 의보(依報)이며,

    중생, 부처 등 주체의 정신 요소인 육근(六根을 말함)과 그 물질 요소인 몸(身)은 정보(正報)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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