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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사찰은 왜 산 속에 많은가?|
    #佛敎 2012. 3. 2. 07:17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평지에 있는 절이 산에 있는 절만큼이나 많았다.

    그리고 산에 있는 절은 그 규모에 있어서 도저히 평지에 있는 절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대찰은 거의 다 산 속에 있고, 사찰이라고 하면

    산 속에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왜 우리나라만 이렇게 산에 있는 절이 많아지게 된 것일까?

     

    1.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산악신앙
    우리 조상들은 나라를 세운 국조(國祖)들은 죽어서 산신이 되어 백성과 국토를 돌볼 뿐 아니라
    국조를 낳은 성모(聖母)는 모두 산신이라고 믿었으며, 또한 그들은 기쁘고 궂은 일이 있을 때마다
    산신을 찾아 기도하던 산악신앙이 강하였기 때문에 불교의 참된 빛 또한 산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많은 고승들은 유명한 산봉우리마다 불교의 지고한 사상을 응축시킨 용어들로 이름을 지어 붙였으며,
    많은 절들이 고유의 산악신앙을 기초로 하여 그 산들을 불보살이 상주하는 불교의 성지로 변화 발전시킴에 따라
    자연스럽게 창건될 수 있었다.


    2.실리적인 호국호법의 의지
    왜구들의 침략과 관련하여 창건된 금정산 범어사, 토함산 석굴암 등의 사찰..
    백제와 국경을 접하는 지리산 등에 세워진 신라의 사찰들..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주요 산성 안에 승군들을 주둔시키기 위하여 많은 사찰을 지음.


    3.불교의 초세속주의 경향
    세속의 명리나 행복보다는 탈속과 해탈을 추구하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 따르는 수도처로는
    그 어느 곳보다도 한적한 산중이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4.도선국사의 비보풍수
    나라 안에 있는 산천의 쇠한 기운을 보익(補益)하여 국가를 튼튼히 하려는 비보(裨補)풍수.
    도선은 인체에 쑥을 놓아 뜸을 뜨듯이 절과 탑을 쑥으로 삼아 국토에 뜸을 놓아
    나라를 튼튼하게 하려고 전국을 돌며 절을 세울 곳을 선정하였으며,
    이 산천비보설은 왕건에 의해 깊이 신봉되어 이후 5백여년 동안 수많은 사찰이 창건됨.


    5.조선의 강력한 배불정책
    태종 6년 - 전국의 사찰 가운데 242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폐사로 만들어 토지와 재산을 몰수.
    세종 6년 - 36개 사찰만 남겨 두고, 승려들의 도성출입을 금지.
    성종 - 도성 안의 염불소(念佛所)와 비구니 사찰 23개 모두 폐지, 전국 승려의 환속을 꾀함.  
    연산군 - 승려의 무조건적인 환속과 더불어 그들을 노비로 삼아 사냥할 때 살생의 동조자인 몰이꾼으로 이용하기까지 함.


    이와 같은 국가 차원의 억압은 개화기까지 계속되었으며,

    유생들의 횡포 속에서 승려들은 맞아 죽어도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다.
    마을 가까이 있는 사찰은 유생들의 주연을 베푸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함.
    결국 왕릉을 돌보거나 왕족의 원찰(願刹)인 몇몇 사찰을 제외하고는
    승려들은 산 속에서 피나는 정진을 통하여 불도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이 5백년의 세월 동안 계속되었으므로 오늘날까지

    절은 의례 산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인식되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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