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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의를 적정하게 하라!
    金剛經 2012. 2. 29. 06:33

    위의가 적정하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온다거나, 간다거나, 앉는다거나, 눕는다’고 하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깊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는 어디로부터 오는 바도 없고,
    또한 어디로 가는 바도 없기 때문에 여래라 이름하는 것이다.”

    위의란 수행자들의 법에 맞는 행위를 나타내는 말로
    움직이고, 머물고, 앉고, 눕는 행주좌와(行住坐臥) 등의
    일체의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승가에서 처음 막 출가한 행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첫 공부는 수행이나 경전공부가 아닌
    움직이고 머물고 앉고 눕는 등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행동규범인 수행자다운 위의에 대한 교육이다.

    경전을 아무리 많이 보고,
    참선을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위의가 법에 맞지 못하다면
    그는 스님으로써 계를 받고 출가할 수 없다.

    그만큼 위의가 중요하며,
    출가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공부이며
    기초가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위의가 중요한 것일까.

    위의란 단순히 행주좌와 간에
    ‘이렇게 해야한다’는 규정된 틀을 만들어 놓고,
    규범이나 법칙처럼 사람을 옭아 메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처음 위의를 교육할 때는
    움직일 때, 머물 때, 앉을 때, 누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본질은 행동에 대한 규제와 억압이 아니다.

    오히려 행주좌와 간에 걸림없는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 위의다.
    움직이고 머물고 앉고 눕는 네 가지 위의에 있어
    어느 한 가지에라도 머물러 집착하고 고집하게 된다면
    반드시 거기에는 괴로움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움직이되 움직임에 집착하지 말고,
    머물되 머무는데 집착하지 말며,
    앉고 눕는 평범한 일상에서부터
    어느 한 가지에라도 집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데
    위의의 중요성이 있다.

    사소한 일상의 행위에서부터
    집착과 탐욕을 없애기 위한 것이 위의의 목적이다.
    즉 위의있는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하되 함이 없는 행’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즉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행,
    즉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고,
    머무는 바 없이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어떤 행위에 있어서도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이를테면 행주좌와에 있어 어떤 좋은 길만을 집착한다거나,
    특별히 어떤 행동만을 좋아하고 어떤 행동은 싫어한다거나,
    어떤 좋은 자리만을 집착한다거나,
    어떤 좋은 잠자리만을 집착하여 그것에 머물러 있다면
    이는 위의 있는 수행자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

    어떤 움직임이나 행위에 있어서도 고정되게 집착하거나,
    좋고 싫어하여 붙잡아 두려하거나
    뿌리쳐 없애려 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 어떤 움직임도,
    그 어떤 행위도 자유롭고 걸림이 없을 수 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수많은 행위를 하고,
    끊임없이 육신을 움직였더라도
    사실은 하나도 움직이지 않은 고요한 행이 되는 것이다.
    적정(寂靜)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분에서 말하고자 하는 위의적정인 것이다.

    다시말해 위의적정이란
    그 어떤 행동, 행위에도 고요한 적정이 있어야 한다는 말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수많은 행위가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머물러 집착함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며,
    그렇게 머물러 집착함이 없을 때
    모든 행위는 고요한 적정의 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함이 없는 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수행자다운 위의인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 위의를 잘못 알아
    행주좌와 간에 어떤 틀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자신의 행을 꿰어 맞추는 것을 위의로 잘못 아는 사람이 있다.

    비구 비구니 스님들의 계율에 보면
    이러한 위의에 대한 세세한 규정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 또한 그 자체에 얽매이기 위함이 아니라
    적정한 위의를 위한 방편의 계율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위의의 핵심은 금강경에서의 가르침처럼
    적정한 위의, 고요한 행,
    즉 하되 함이 없는, 머물러 집착함이 없는 행인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온다거나, 간다거나, 앉는다거나, 눕는다’고 하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깊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는 어디로부터 오는 바도 없고,
    또한 어디로 가는 바도 없기 때문에 여래라 이름하는 것이다.”


    위의적정분의 본문은
    이러한 수행자의 위의에 대해 잘 알려주고 있다.
    부처님의 위의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귀한 법문을 들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온다거나, 간다거나, 앉는다거나, 눕는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의 뜻을 깊이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여래는 어디로부터 오는 바도 없고,
    가는 바도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여래라 하기 때문이다.

    즉 ‘여래가 온다거나 간다거나 앉는다거나 눕는다’는
    그 겉모습만 보고 여래를 판단한다면 그것은 여래를 잘못 본 것이다.
    여래는 오고 가고 앉고 눕는데 있어
    그 어떤 행에도 집착함이 없다.

    그렇기에 오고 가고 앉고 눕더라도
    오고 가고 앉고 눕는 바가 없는 것이다.
    즉 ‘함이 없는 행’, 무위(無爲)의 행이라는 말이다.
    행주좌와 모든 위의가 그대로 고요한 적정의 행이요,
    집착 없고 함이 없는 행인 것이다.

    여래라는 말도 그 원어인
    ‘타타가타(Tathagata)'를 보면
    여래(如來)라는 뜻도 되고 여거(如去)란 뜻도 되니,
    이는 항상 여여하기 때문에
    오는 것에도 가는 것에도 걸리지 않으며,
    와도 옴에 머물지 않고 가도 가는데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여래처럼 수행자의 위의도 이와 같아야 한다.
    마음을 일으킬 때에도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집착없이 마음을 일으켜야 하듯이,
    몸을 움직이는데 있어서도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집착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수행자는 모름지기 행이 무거워야 한다.
    촐싹대로 이리저리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마음도 마찬가지 아닌가.
    마음이 촐싹대며 원숭이처럼 이리저리 쉼 없이 움직이면
    끊임없이 번뇌와 욕심만을 붙잡고 다닐 뿐이다.

    그러나 마음이 무거워 밖으로 많이 나다니지 않고,
    마음이 있는 곳을 잘 주시하며 비우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정혜(定慧)요 지관(止觀)의 수행이 아닌가.

    그러나 마음이 대상에 끄달려 움직이고 마음을 일으킬지라도
    마음이 가는 곳을 잘 지켜보고,
    마음이 무언가 번뇌와 욕심과 집착을 붙잡고 들어오지 못하게
    잘 비울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마음을 일으키더라도
    적정한 가운데 고요한 지혜가 깃들 수 있는 것이다.

    즉 마음을 일으키되 머무는 바 없이,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면
    수만가지 마음을 일으키더라도
    한 치의 마음도 움직임이 없는 적정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육신의 행도 그렇다.
    될 수 있다면 촐싹대며 이리저리 많이 나다닐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위의를 적정하게 하기 위해서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육신으로써 할 일은 다 하더라도
    거기에 머물지 않으면 된다.
    즉 몸이 움직일 때 움직임을 잘 관찰하고,
    걸을 때 걸음 걸음을 잘 관찰하며,
    앉고 일어설 때, 가고 올 때
    항상 그 움직임을 잘 관찰하여 비추어볼 수 있다면
    그 행에는 집착이 붙지 않으며 적정한 행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근본불교 핵심 수행법인 사념처(四念處)에서도
    네 가지 지켜볼 것 가운데 첫 번째가 신념처(身念處),
    즉 몸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인 것이다.

    오거나 가거나 앉거나 누울 때
    부처님은 항상 깨어있다.
    올 때 온다는 깨어있는 알아차림이 있으며,
    갈 때 가고 있다는 깨어있는 알아차림이 있다.

    걸을 때는 오직 걷는 그 순간
    오로지 걷는 그 한가지에 집중하여 알아차릴 뿐이다.
    그랬을 때는 와도 온 것이 아니며 가도 간 것이 아니다.
    오직 ‘지금 여기’에서 깨어있는 행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천리 길을 가더라도 오직 부처님의 발걸음은
    ‘지금 여기’에 깨어있을 뿐
    천리를 갔다느니 만리를 갔다느니 하는 분별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가.
    천리 만리를 가야 한다면 가기 전부터,
    가는 순간 순간 ‘언제 이 길을 다 갈 것인가’
    ‘언제 도착할 것인가’ 하는 분별에서부터,
    머릿속은 가는 순간 순간에도 끊임없이 수많은 생각들로 가득 찰 것이다.

    그랬을 때 그 사람은 걷는 ‘지금 이 순간’에 없다.
    몸은 걷고 있지만 머릿속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세상을 몇 번이고 만들었다 파괴하고,
    사람을 수도 없이 살리고 죽이며
    기어이 적정의 순간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깨어있는 자라면,
    위의가 적정한 수행자라면
    천리 만리를 가고 오더라도
    오직 ‘지금 여기’에 깨어있는 순간만이 있다.
    그것이 바로 위의적정이다.

    온전한 깨어있음만이 수많은 행위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와도 오지 않고 가도 가지 않은 적정으로 안내한다.
    오는 바도 없고 가는 바도 없는 여래의 길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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