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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처님은 어떤 모습일까?[
    金剛經 2012. 2. 23. 06:36

     

     

    법신은 상이 아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32상을 구족한 것을 여래라고 볼 수 있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의 설하신 뜻을 아는 바로는
    32상을 구족한 것을 여래라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고 그렇다. 수보리여, 참으로 그러하다.
    32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일 32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라고 보아야 한다면
    전륜성왕도 역시 여래라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수보리 존자가 세존께 사뢰었다.
    “제가 세존의 설하신 뜻을 깊이 아는 바로는
    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라고 봐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세존께서 게송을 읊으셨다.

    “만일 형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법으로 여래를 보아야 한다.
    참된 여래는 법을 몸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의 본성은 분별로 알아지지 않나니
    그것은 분별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법신비상분은 여래의 참된 몸, 법신은 형상에 있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32상이라는 형상을 구족했다고 모두 여래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여래가 32상을 구족하기는 했을지언정
    32상을 구족한 것을 모두 여래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형상으로 여래를 구하거나,
    음성으로 여래를 찾지 않도록 이끌기 위한 법문이다.

    이 분은 산스크리트 원전이나 현장역에서는
    모두 위와 같이 번역하고 있는데 반해
    구마라집의 역본에서만 조금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구마라집 번역본에서는 문맥의 앞뒤가 누락된 것 처럼 번역하고 있으나
    전체적인 전개 논리가 나름대로 정연하게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볼 때
    잘못된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극적이고
    일반적인 금강경의 흐름을 깨는 번역을 볼 때
    구마라집의 번역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마지막 게송 또한 구마라집은 위의 게송만을 번역하였지만
    원전이나 현장의 번역에서는 두 번째 게송 또한 등장하고 있다.

    어쨌든 여기에서는, 일반적인 구마라집의 금강경에서
    우리가 전에는 볼 수 없었고,
    원전과 현장의 역본에서만 볼 수 있는
    원전의 본문과 추가된 게송을 옮김으로써
    구마라집의 번역본을 기본으로는 하되
    원전과 비교해 눈여겨 봐야 할 구절은 추가시키고자 했던
    본래의 취지를 살려 해석해 두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32상을 구족한 것을 여래라고 볼 수 있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의 설하신 뜻을 아는 바로는
    32상을 구족한 것을 여래라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고 그렇다. 수보리여, 참으로 그러하다.
    32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일 32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라고 보아야 한다면
    전륜성왕도 역시 여래라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수보리 존자가 세존께 사뢰었다.
    “제가 세존의 설하신 뜻을 깊이 아는 바로는
    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라고 봐서는 안 됩니다.”



    여래는 일반 범부와는 다른 32가지 특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렇듯 여래에게 32상이 구족되어 있다보니
    일반 중생들은 32상을 구족했다는 그 특징적인 형상에 여래를 가두게 된다.

    32상을 구족해야만 여래고,
    그렇지 않으면 여래가 아니라거나 하는 등으로
    32상을 여래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이 분에서는 여래를 형상에 가두는 어리석음을 타파해 주고 있다.
    어찌 여래가 형상에 갇힐 수 있겠는가.
    32상이라는 외형상의 조건에 여래를 가둘 수 있겠는가.
    여래는 형상을 뛰어넘어 존재한다.
    어떤 특정한 형상에 여래를 가둘 수는 없다.

    여래가 되고 보니 32상이 구족된 것이지,
    노력하고 애써서 32상을 구족하니까 저절로 여래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32상을 구족한 것 자체에 여래라는 덕성이나 본질이 있다면
    전륜성왕도 여래라고 해야할 것 아닌가.
    그러니 32상을 구족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
    여래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여래를 32상이라는 형상으로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찾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법을 행하는 것이 아닌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다.
    형상으로써 여래를 찾는 사람은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여래께서는 형상에 얽매여 진리를 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고 계신다.


    그러자 세존께서 게송을 읊으셨다.

    “만일 형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어떤 특정한 형상으로 부처를 보려 하거나,
    어떤 특정한 음성으로 여래를 찾으려 하는 것은
    곧 삿된 도를 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에
    그런 사람은 능히 여래를 볼 수 없다.

    ‘부처님처럼 깨달음을 얻으신 분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을 구족하고 계실거야’
    ‘부처님의 음성은 맑은 이슬처럼이나 청아할거야’
    ‘인도에서 살아계셨던 부처님은 과연 어떻게 생기셨을까’

    혹여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그것은 모두 형상이나 음성으로 부처를 찾는 것이기에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어떤 특정한 몸이나 음성을 가진 분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며 생명들이
    저마다의 독자적인 형상과 모습, 음성을 가지고 있듯
    부처님 또한 자기 자신으로써의 독자적인 형상과 음성을 가지고 계실 것이다.

    그런데도 바로 그 부처님만이 가지고 계신 형상과 음성을
    부처와 동격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어리석은 이들은 자기 잣대를 가지고 미리부터 분별을 하곤 한다.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니 후덕하고 잘생기고 인자하게 생기셨을거야’
    ‘음성은 얼마나 좋으실까’

    그러나 그런 형상이나 음성에 깨달음이 담기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 모습과 음성이 저마다 다르듯
    깨달은 이의 형상이나 음성 또한 저마다 다 다르다.

    어떤 한 가지 특정을 가지고 부처를 한정짓지 말라.
    어떤 특정한 형상이나 음성을, 어떤 특정한 성격이나 취미를 가지고
    깨달은 자를 한정지어선 안 된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깨달음은 어떤 특정한 성격이나 외모나 음성 같은데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께서
    언젠가 깨달음을 얻었다면
    바로 지금 그 모습 그 음성 그대로 여래가 되는 것일 뿐이다.

    깨달음을 얻은 순간 갑자기 변신하듯
    내 몸에 32상과 80종호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그렇게 특별하거나 기이한 어떤 것이 아니다.
    32상이라는 것은 단지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의 형상을 잘 관찰해 보았더니
    32가지의 일반인과 다른 모습을 나타냈다는 의미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과 다른 특별한 점을 뽑아보라고 한다면
    32가지 이상이 되지 못하겠는가.
    그러니 32상이라는 형상에 얽매여 부처를 본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것은 흡사 사도를 행하는 것이며,
    그렇게 신앙하는 자는 언제까지고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여래의 몸은 어떤 특정한 형상이나 음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여래의 몸은 법신이라고 한다.
    법신이란 어떤 특정한 모습이란 말이 아니다.
    그저 진리의 몸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진리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있다.
    부처님 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 법계 그 어느 곳에도 두루하여 있는 것이 진리다.

    그러니 법신 또한 우주법계 그 어디에도 두루 편만한 것이다.
    ‘법신편만백억계(法身遍滿百億界)’
    법신이 백억의 세계에 두루 충만하다는 말은 바로 이를 뜻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몸은 32상에 갇힌 것이 아니라
    이처럼 법신으로써 온 우주법계에 두루한 것이다.
    그러니 우주법계 삼라만상이 두두물물 모두 부처님 몸 아닌 것이 없다.
    즉 부처님은 32상호를 갖춘 몸에만 깃드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물 만생 그 어떤 형상에도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구마라집 역에는 생략되어있는 다음 게송을 보면
    보다 명확히 드러난다.


    “법으로 여래를 보아야 한다.
    참된 여래는 법을 몸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의 본성은 분별로 알아지지 않나니
    그것은 분별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래의 몸은 형상의 몸 육신이 아닌 법신(法身)의 몸이다.
    법으로써 여래를 보아야지
    그 어떤 형상이나 음성으로 여래를 보아선 안 된다.
    참된 여래는 법을 몸으로 하기 때문이다.

    [화엄경]에서도
    ‘부처님 몸은 법계에 충만하여 널리 일체중생 앞에 나타나시니
    인연따라 감응하여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시되
    항상 보리좌에 앉아 계시다’
    (法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衆生前 隨緣赴感未不周 而恒處此菩提座)고 하였다.
    여래의 몸이 법신이기에 이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모두 법신인 것이다.

    사람, 짐승, 곤충, 나무, 풀, 땅, 하늘, 바람, 구름, 우주
    이 모두가 여래의 몸 법신 아닌 것이 없다.
    모두가 법신불인 것이다.
    나도 너도 법신부처요,
    사람도 자연도 짐승도 모두가 법신부처 아닌 것이 없다.

    그럴진데 어찌 32상호를 구족한 몸만을 가지고
    여래의 몸이라고 한정지어 말할 수 있겠는가.
    일체 모든 존재가 모두 법신일 뿐, 범부거나 중생인 것은 없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의 무장무애하고 걸림없는
    무량광 무량수의 무한설법이다.

    이러한 법신관에서는 깨달은 자가 어리석은 중생을 가르친다거나,
    높은 계급의 사람이 낮은 계급의 사람 위에 군림한다거나,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하거나,
    인간이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거나 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모두가 부처의 몸일진데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사람 몸만 법신이 아니라,
    짐승의 몸도, 곤충의 몸도, 나무며 야생화 한 그루의 몸도 모두가 법신이다.

    그러니 산을 깎아 아파트를 짓는 일도, 터널을 뚫는 일도,
    나무 한 그루를 자르는 일도, 꽃 한 송이를 뽑는 일도
    모두가 부처님의 몸 법신을 훼손하는 일이다.

    이러한 법신의 가르침은 도무지 우리의 사량분별로는 헤아리기 어렵다.
    어떻게 사람의 몸이나 짐승의 몸,
    혹은 나무나 하찮게 보이는 풀들의 생명이
    모두 똑같은 법신일 수 있다는 말인가.

    또한 어찌 아직 깨달음을 얻지도 못한 어리석은 중생인 내가
    법신부처일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분별로는 알아지지 않는다.

    저 게송의 말씀처럼 진리라는 법의 본성이
    본래 분별로는 알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도무지 이 가르침은 분별로는 알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도 중생일 때는 깨달음을 얻고자,
    진리를 얻고자 노력하고 정진하셨지만
    막상 깨달음을 얻으신 순간
    ‘깨달음을 얻고 보니 구제할 중생이 없다’고 하셨다.

    모두가 법신불이란 것을 깨달음을 얻고 보니 비로소 깨달으신 것이다.
    이처럼 온전한 깨달음이 바탕이 되었을 때만이
    진정으로 일체 모든 만물이 다 법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
    우리의 사량 분별로써 법신을 알겠다고 하면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법의 본성은 분별로 알아지지 않나니
    그것은 분별해 알 수 없기 때문이다’고 했다.
    분별로 알아지지 않으니
    무분별의 함이 없는 수행으로써 정진해 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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