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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처님이 교화를 했다고?[
    金剛經 2012. 2. 22. 06:36

     

     

    교화하는 바 없이 교화하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을 하겠느냐?
    참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실로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여래가 제도할 어떤 중생이 있다면
    여래는 곧 아 인 중생 수자가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내가 있다’는 것은
    곧 ‘내가 있음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지만 범부들은 ‘내가 있다’고 여긴다.

    수보리야, 범부라는 말도
    여래는 곧 범부가 아님을 말한 것이니 이름하여 범부라 한 것이다.”

    화무소화는 교화하되 교화한 바가 없음을 말하고 있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함으로써 교화한다고 하지만
    이 모두는 방편의 말일 뿐이다.

    본질에 있어서는 깨달음도 어리석음도 없으며,
    깨달음을 얻은 부처도 어리석은 중생도 없고, 설할 법도 없다.
    교화의 주체도 대상도 내용도 모두가 다 텅 빈 공일 뿐이다.

    부처님께서 말로써 표현하신 모든 것은 하나같이 방편이다.
    입을 열었다 하면 그것은 모두 방편일 뿐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여기에 집착한다.
    부처님의 말씀이라면 그것이 곧 절대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믿음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부처의 본질의 법문은 침묵 속에 이미 끝났다.
    금강경의 1분에서 침묵으로 탁발을 하시고 공양을 하시며
    발을 씻고 자리를 펴고 앉는 순간 본질의 법문은 이미 끝이 났다.

    그리나 나머지 제자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으로 이어지는
    이 금강경의 긴 파노라마는
    어디까지나 방편이요 연극에 불과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처럼 수많은 방편으로
    수많은 중생들의 근기에 응해 주심으로써 중생들을 교화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러한 부처님의 생애를 보고
    부처님의 교화에 감탄을 내뱉으며 찬양 찬탄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분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교화하되 교화한 바가 없다고.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어리석은 중생에게
    지혜의 법을 설함으로써 교화한다고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을 하겠느냐?
    참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실로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여래가 제도할 어떤 중생이 있다면
    여래는 곧 아 인 중생 수자가 있는 것이다.


    여래는 스스로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이 없다.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은 부처에게 있어 얼마나 큰 모순인가.
    부처는 일체의 차별과 분별이 없으신 분이다.
    본래 이 법계에는 그 어떤 차별상도 없으며, 그 어떤 나뉨도 없다.
    오직 고요와 평화와 침묵 그리고 여여한 ‘그것’만이
    있음 없음을 넘어서 있을 뿐이다.

    부처는 ‘나’라는 상이 없으니 ‘내가’라는 말이 성립할 수 없다.
    또한 부처에게는 중생도 부처도 없고 생사와 열반의 차별도 없다.
    부처의 눈에는 오직 대 평화의 고요함만이 있을 뿐이지
    그 어떤 차별도 경계도 없다.
    부처 눈에는 오직 부처만 보일 뿐이다.

    그러니 ‘중생을’이라는 말도 성립될 수 없다.
    ‘제도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제도한다는 생각이 일어나려면
    어리석은 중생이 있고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있어서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법을 설해 깨달음을 얻도록 해 줘야 한다는 말인데
    부처에게는 그 어떤 것도 없다.

    중생도 부처도 어리석음도 깨달음도 법도 제도도
    다 공한 방편의 말들일 뿐이다.

    여래에게는 실로 제도할 중생이 없다.
    만일 여래가 제도할 어떤 중생이 있다고 한다면
    그 말은 곧 여래에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는 말일 것이다.

    즉 여래가 교화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여래가 상에 빠져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곧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다.

    이처럼 여래는 만 중생을 모두 제도하고도 제도했다는 상이 없다.
    스스로 상을 없애고 싶어서 상을 버린 것이 아니라
    진리의 성품이 그 어떤 실체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진리를 깨달아 버린 연후에는 저절로 상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상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애써서 상을 버린 것은
    참으로 버린 것이 아니다.
    진리와 하나되어 있기 때문에
    진리의 성품이 상이 없으므로 저절로 상이 붙을 자리가 없는 것일 뿐이다.

    수행자의 참된 면모도 이런 모습에서 온다.
    스님이든, 포교사든, 일반 재가 수행자든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의 공통적인 서원이 바로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일,
    그러나 이 또한 모두가 상 없는 가운데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스스로 수행을 하면서 수행 잘 한 것을 내세우려 하거나,
    내가 수행을 잘 한다는 상을 가지거나,
    또 교화를 하면서 스스로 교화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를 내세우고자 한다면
    그는 참된 수행자의 반열에 들 수 없다.

    수행 잘 한다는 말처럼 수행 안 된 말이 없고,
    교화 잘 한다는 말처럼 교화의 본 뜻을 흐리는 말도 없다.

    부처님은 스스로 수행을 잘 해 부처가 되었다거나,
    교화를 잘 해 일체 모든 중생을 교화했다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 분이시다.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내가 있다’는 것은
    곧 ‘내가 있음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지만
    범부들은 ‘내가 있다’고 여긴다.

    수보리야, 범부라는 말도
    여래는 곧 범부가 아님을 말한 것이니
    이름하여 범부라 한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경전을 살펴보면
    때때로 여래가 ‘내가 중생을 교화했다’거나,
    여래 스스로 ‘내가’ 혹은 ‘나 여래는’ 이라고 한 경구들을 살펴볼 수가 있다.

    또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고 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에 대한 경구도 찾아볼 수가 있다.

    이러한 경구를 보면 지금 금강경에서 말한 법문과는
    사뭇 다른 부분이라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래가 스스로 ‘나’라고 하지 않는다고 해 놓고
    경전에는 여래가 스스로를 나, 여래 등으로 표현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언어로 표현을 해야 하다 보니 그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열반사덕도 마찬가지다.
    부처님 말씀에는 이 세상에는 항상한 것이 없고,
    언제까지나 즐거운 것이 없으며,
    고정된 실체로써의 내가 없고,
    불구부정으로 본래 항상 깨끗한 것은 없다고 해 놓고,
    열반의 덕성인 열반사덕으로 상락아정을 꼽고 있는 것을 보면
    이해가 안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또한 방편의 말씀임을 알아야 한다.
    열반사덕에서 말한 상락아정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항상하고 즐겁고 내가 있으며 깨끗한’
    그런 경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즐거운 것이 없으며,
    내가 없고, 깨끗하고 더러운 분별이 없는
    그 현실에서 깨달음을 얻게 되면
    어떻게 변하게 되는가를 궁금해 하는 중생들을 위해
    방편으로 설한 것일 뿐이다.

    어쩔 수 없이 말로 표현해야 하다보니 상락아정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이 상락아정은 그 반대되는 말에 대한 상대 개념의 상락아정이 아니다.
    그 양 변을 넘어서는,
    말이 가 닿을 수 없는 대 적멸의 개념인 것이다.

    더 쉽게 표현하자면 상락아정의 ‘아’ 즉, ‘나’라는 것도
    ‘내가 있다’는 개념이 아니라,
    대아(大我), 진아(眞我), 전체아(全體我),
    즉 참나, 본래성품, 본래면목, 자성불을 의미하는 ‘나’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단어 또한 방편으로 붙여진 이름이지
    그 이름에도 집착해 ‘참나가 있다’고 한다면 그 또한 집착일 뿐이다.
    그래서 ‘참나가 있다’는 말은 다시 말해 ‘내가 있지 않다’는 말이다.

    즉,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있다’는 말은
    어떤 실체적인 의미로써 ‘내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어떤 실체성도 없는 ‘내가 있음이 아님’을 말하신 것이다.

    경전에서 일반적으로 ‘나’라고 하면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연기된 존재로써의 나(假我)’이며,
    둘째는 ‘참나로써의 나(眞我)’다.

    일반적으로 경전에서나 스님들의 설법에서는
    이 두 가지 나를 이원적으로 나누어 말하곤 하는데,
    이 말도 어쩔 수 없이 표현해야 하다보니 그렇게 나누어 놓은 것이지
    본질에 있어서 그 두 가지 나는 결국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연기된 존재로써의 나는
    수많은 인연들이 화합하여 만들어진 나를 의미하고,
    이는 곧 실체성이 없는 연기아(緣起我)이며, 그렇기에 무아(無我)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독자적인 실체로써의 내가 아니라,
    이 우주 법계에서 잠시 요소 요소를 인연에 맞게 빌어 온 나이기 때문에
    사실은 ‘내가 없는 나’ ‘전체로써의 나’인 것이다.

    즉 이 우주법계에서 잠시 인연따라 몸은 지수화풍에서 빌어 오고,
    정신은 수상행식에서 빌어 와
    조화롭게 어느 한 순간 존재를 이룬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니 이 몸은 내 몸이 아니라
    법계가 나로써 잠시 잠깐 모여진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 연기된 존재로써의 나를 움직이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근원이 무언가 있어야 이 몸을 이끌고 갈 수 있지 않은가.
    길을 걷는 자가 누구인가.
    생각하는 자, 몸을 움직이는 자가 누구인가.

    그것은 단지 몸이기만 한 것도 아니요,
    뇌이거나, 생각이거나, 마음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 이 인연가합의 실체도 없는 가짜인 나를
    이끌고 가는 무언가가 있기는 있다.

    그것이 없다면 이 가짜가
    어떻게 말도 하고, 생각도 하며,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가짜 나의 뒤에,
    가아(假我)의 본래 주처의 본연 바탕에 있는 것을 이름하여
    ‘참나’, 혹은 진아, 대아, 자성불, 본래면목 이라는 등의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참나로써의 나’, 진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있다’고 단정지어 놓으면
    있고 없음의 양 변에 치우칠 뿐이다.
    이 참나를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으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할 수도 없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내가 있다’고 하신 이유는
    곧 ‘내가 있음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가짜의 나가 되었든, 진짜의 나가 되었든
    ‘내가 있다’는 것은 곧 내가 있음이 아닌 것을 말한다.

    그런대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부처님께서 ‘내가 있다’고 하면
    그것이 방편인 줄 알아 ‘내가 있음이 아님’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데,
    말 그대로 ‘내가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니 그것이 병통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나’(我)는 ‘나 아님(無我)’을 의미하고,
    ‘마음(心)’은 ‘마음 없음(無心)’을 의미하며,
    범부 또한 범부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아니므로 그리하여 나가 되는 것이고,
    마음은 마음이 아니므로 그리하여 마음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범부도 범부가 아니기에 이름하여 범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논법의 참된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
    이 논법이 줄기차게 금강경에서 의미하는 것은 다름 아닌 무집착이다.
    집착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실체 없음, 즉 공이기 때문이다.

    금강경, 반야심경을 비롯한 반야경의 핵심이 바로 공사상이 아닌가.
    공사상을 전하기 위해 일반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반 논리를 초월하는 금강경 논법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논리적인 것의 교묘한 술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논리를 초월하는 논리, 논리 아닌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야 ‘논리적인 것’에 얼마나 신뢰를 보내는가.
    그러나 그 논리라는 것이 가만히 살펴보면
    모순 덩어리일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논리적으로 전혀 다른 두 가지 논거가
    논리라는 이름으로 논리적으로 증명되는 것들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과학적, 합리적이라는 이름으로
    전혀 다른 두 개의 반대의 결론이
    과학적 증명을 거쳐 버젓이 우리 앞에 오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 두 극단이 모두 논리적이며 과학적이라면
    과연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한단 말인가.
    깨달음은 논리 그 너머에 있다.
    논리적 증명 그 너머에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처럼 여래인 부처가 범부인 중생을 교화한다고 하지만
    사실 본질적인 면에서 보자면,
    교화하는 여래가 나라고 했던 것도 결국 나 아닌 것을 말하며
    교화되는 범부 또한 결국 범부가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이다.

    교화하는 여래도 여래가 아니며 이름이 여래일 따름이고,
    교화되는 범부도 범부가 아니며 이름이 범부일 뿐이다.
    즉 교화하는 주체도 대상도 모두가 이름일 뿐,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여래도 범부도 모두 공하고 텅 비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화무소화’
    즉 교화하되 교화한 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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