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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무주의에 빠지지 말라
    金剛經 2012. 2. 27. 06:48

     

    단멸함이 없다.

    “수보리야, 네가 만약 생각하기를 ‘여래가 구족한 상을 갖추었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겠느냐?

    수보리야,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여래는 구족한 상을 갖추었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다.

    또한 수보리야, 네가 만약 생각하기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모든 법의 단멸을 인정한다’고 하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어떤 법의 단멸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금강경은 경문 전체에 걸쳐 일체 모든 형상을 타파하는데 법문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찬가지로 이 분에서도 구족한 상을 갖추었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라고 함으로써
    부처님의 구족상까지도 집착해서는 안 될 타파의 대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금강경 전체에 걸친 상의 타파에 대해 혹 어떤 이는 공허감이나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금강경의 말씀처럼 모든 것이 다 허망하고 텅 빈 것이라면 이 세상에는 결국 아무것도 없고, 진실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렇다면 세상을 살아 갈 의미도 없고, 잘 살 필요도 없으며, 깨달음도 다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무기(無記)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분 무단무멸분은 그러한 생각에 치우친 이들을 위한 설법이다.
    단멸이라는 상, 아무것도 없다는 상, 모든 것이 다 끊어져 아무것도 없다는 상에 빠진 이들을 위해 이 분에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킨 이는 그 어떤 단멸상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 그러면 차근 차근 본문을 살펴보자.

    “수보리야, 네가 만약 생각하기를 ‘여래가 구족한 상을 갖추었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하겠느냐?

    수보리야,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여래는 구족한 상을 갖추었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다.

    앞의 분에서 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라고 봐서는 안 된다고 했던 것에 이어 마찬가지로 구족한 상을 갖추었다는 그 사실을 가지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구족한 상을 갖추었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그 어떤 형상 속에 깨달음이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나 금강경 해설 책들에서 이 부분의 해석을 구마라집의 번역본만 보고 26분과의 상대적인 연관선 상에서
    ‘여래가 구족한 모습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그것은 산스크리트본의 해석이 아직 통용되지 않았을 때의 오류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또한 그렇더라도 금강경의 본래 의미가 심각하게 훼손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문안한 해석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산스크리트본의 금강경을 보았을 때 이 부분의 해석은 ‘여래는 구족한 상을 갖추었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다’고 봄으로써 앞 장과의 의미상 흐름을 함께 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라 여겨진다.

    즉 앞 장의, ‘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여래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에 이어 ‘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다’라고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도 깨달음도 구족된 상으로써 전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구족된 상이 여래나 깨달음을 의미하는 필요충분 조건은 되지 못한다.
    부처님도 깨달음도 어떤 특정한 상에 구속되지 않는다.

    만약 어떤 특정한 모양이 부처요 깨달음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깨달은 사람은 똑같은 특성과 똑같은 성격과 똑같은 외모를 가져야 할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알고 있는 깨달았다는 수많은 역대 고승들은 모두가 똑같은 성격과 특징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지 않은가.
    깨달음이란 어떤 특성이나 모양 속에 담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법도 천차만별이요, 큰스님의 모습도 천차만별이며, 보살의 모습도, 부처의 모습도, 가르침이나 경전의 종류도 천차만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한 가지 수행법만이, 한 가지 모습만이, 한 가지 경전만이, 한 가지 성격만이 깨달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수행자의 숫자만큼, 근기의 종류만큼이나 다를 수 있다. 저마다의 모습이 다 다르듯 저마다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이 다를 수 있다.

    또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획일화된 한 가지 모습에 한정되는 것이 아닌 저마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모습으로써 드러나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깨달음이란 모든 존재들이 저마다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써 피어날 때의 그 걸림없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보통 우리들 생각에 깨달은 큰스님은 성격도 인자해야 하고, 발걸음도 느려야 하며, 목소리도 차분해야 하고, 외모는 어떻고, 행동은 어떻고 하면서 저마다 스스로 생각해 놓은, 만들어 놓은 틀 속에 깨달음의 모습을 가두곤 한다.

    내 안에서 그렇게 딱 고정지어 놓고서는 ‘저 스님은 너무 말이 많아’ ‘저 스님은 너무 화를 잘 내’ '저 스님은 스님같지 않아’ 하면서 이런 저런 판단을 하곤 한다.

    그러나 그 기준이나 판단이 모두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상이 아닌가.

    사실 가장 스님다운 사람은 전혀 스님답지 않은 사람이다.
    수행자다운 사람은 전혀 수행자답지 않다.
    스님답다는 것은 스님이라는 어떤 ‘틀’ 속에 자신을 잘 짜맞추며 산다는 뜻이 아닌가.
    그것은 속박이고 구속일 뿐이다.

    가장 자기 자신다울 때 가장 수행자다움이 움튼다.
    스님으로써의 위의(威儀), 스님으로써의 모습, 사회에서 승가에서 정해 놓은 스님으로써의 스님다운 구족한 상을 갖추었다고
    가장 훌륭한 스님이요 깨달음을 얻은 스님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족한 상을 갖추었기 때문에 스님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이 구족된 것이 아니라 진리가 구족되어야 하는 것이다.

    스님에 대한, 수행자에 대한, 깨달은 이에 대한, 또 깨달음에 대한 나의 생각에 스스로 갇히지 말라.
    그런 고정된 상을 가지고 있다보면 그 틀에 맞는 사람만 찾게 되고 그러다보면 참된 스승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걸인의 모습으로 나투신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한 한 수행자의 일화는 이러한 사실을 더욱 일깨워준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문수보살 아닌 분이 없고, 부처 아닌 것이 없으며, 참된 스승 아닌 것이 없지 않은가.

    다만 내 견해가 부처를 보살을 스승을 ‘이러 이러한 분’으로 딱 정해 놓았기 때문에 그런 기준에 틀에 맞는 사람만을 애써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틀을 깨면 내 이웃도, 친구도, 가족도, 어린 아이도, 대자연의 변화도 모두 내 스승 아닌 것이 없고, 부처 아닌 것이 없다.
    내 스스로 상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모든 것이 그대로 부처요 참빛이다.

    자연을 보라.
    소나무도 세상 천지에 똑같이 생긴 소나무가 하나도 없고, 제비꽃도 똑같이 생긴 제비꽃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렇듯 서로 다른 저마다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연의 이치와 조화를 이루며 생명을 꽃피워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저마다 자기다운 삶이 있고 자기다운 독창적인 모습이 있다.
    바로 그 모습을 찾는 것, 가장 자기다운 모습과 삶을 찾는 것 그것이야말로 깨달음의 여정이 아닐까.

    과거 고승들의 일화를 보면 깨달음이 오는 소식도 저마다 다르지 않은가.
    법문을 듣다가 깨달음을 얻는 분도 계시고, 기왓장을 갈다가, 마당에 비질을 하다가 깨달음을 얻기도 하지 않는가.

    그것은 저마다의 근기가 다르고 저마다의 삶의 다르기 때문이다. 아마도 1,000명의 수행자가 있다면 1,000가지 수행법이 있을 것이고, 1,000가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있을 것이다.
    똑같이 좌선을 하고 있더라도 그 내면의 세계, 그 자내증(自內證)의 세계는 저마다 다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저마다 다른 바로 그 점이야말로 진리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로써 피어나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지금도 이렇게 진리는 나의 모습으로 내 앞에 있지 않은가.
    내 스스로 나에게 활짝 드러난 깨달음은 보지 않고, 다른 누군가에게 다른 그 어떤 특별한 스승이나 수행법이나 경전 속에서
    어렵게 구해야만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높게 울타리를 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 모든 틀을 놓아 버리라. 그 모든 상을 깨라.


    또한 수보리야, 네가 만약 생각하기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모든 법의 단멸을 인정한다’고 하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어떤 법의 단멸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금강경에서는 끊임없이 모든 법이 다 허망하며 고정된 실체가 없고 공하다고 설해 왔다.
    그 어떤 상에도 얽매여선 안 된다.
    설사 여래의 구족된 32상 또한 실체적인 것이 아니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상호를 구족했다고 여래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깨달음을 얻었다고도 할 수 없다.
    이처럼 상이 있는 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
    범소유상이 모두 개시허망이기 때문에 우리가 실천해야 할 요지는 약견제상비상함으로써 즉견여래하는 것이다.

    즉 모든 상이 허망하여 실체가 없으므로 상이 상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보았을 때 여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금강경은 끊임없이 상의 타파라는 일관된 주제에 몰입해 있다.

    그러나 이처럼 상을 타파하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형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런 쓸모도 없고, 다 필요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에 치우쳐 실체화함으로써 집착하고 욕망하며 그로인해 괴로운 인간의 삶을 여실히 보셨기 때문에
    모든 상을 보되 본연에는 상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보아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자유로와지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강경의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자칫 이 세상은 아무것도 없다는 단멸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이다.

    단견(斷見)이란 상견(常見)과 대립되는 말로 상견은 불멸하는 어떤 실체가 있어 항상하여 무너지지 않는다는 생각이고
    반대로 단견은 일체 모든 것이 끊어져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이 두 가지 생각은 모두가 극단으로 중도에 어긋나는 치우친 견해다.

    그러니 단멸이란 일체 모든 것은 다 허망하고 진실되지 못한 것이므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허무주의적인 생각이다.
    불멸하며 항상한다는 상견론이나 단멸하며 항상하지 않고 아무것도 없다는 단멸론이나 모두가 치우친 견해이기에 양 변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금강경을 공부하다보면 실재로 이런 단멸론에 빠지기 쉽다.

    또 사회에서 불교를 보는 관점도 불교는 허무주의라고 하고 무의미한 종교라고 하는 말들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불교를 단멸론으로 잘못 생각한 탓이다.

    여기서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며 치우친 단멸론에 빠지지 않을 것을 주문하고 있다.
    금강경에서는 법도 없고 법 아닌 것도 없으며, 아상도 없고, 중생구제도 없으며, 복덕도 없고, 여래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고 설하고 있다.

    끊임없이 그 어떤 고정된 실체도 없으니 어떤 것에도 끄달려 집착하지 말라고 설하고 있다. 이렇듯 계속된 개시허망의 가르침을 듣다보면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라고 하는 단멸상에 빠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듯 불교는 단멸론이 아니다. 다만 금강경에서 일체 모든 상이 허망함을 말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상에 빠져 집착하고 욕망하며 나아가 그로인해 괴로워하고 투쟁과 전쟁까지 일삼는 그런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일체 모든 상이 허망함을 알지언정
    어떤 법의 단멸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으며 공허감에 무기력해 지지도 않는다.
    다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뿐이다.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현실이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현실을 무시한다는 말이 아니라
    현실을 생동감있게 살아나가면서도 그 현실에 집착하거나 얽매이거나 치우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좀 더 쉽게 말해 세상을 살아가며 사랑도 하고, 직장 생활도 하고, 돈도 벌고, 이웃과의 관계도 가지고, 수행도 하며 살아가지만
    그 모든 것이 궁극에는 비실체적인 줄 알기 때문에 전적으로 집착함이 없다는 말이다.

    사랑을 하되 사랑에 집착해 상대방을 괴롭게 하고 나 자신을 괴롭히며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돈을 벌되 돈에 집착하여 돈만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그런 어리석은 믿음을 갖지는 않는다.

    돈이 고정된 실체가 아닌줄 알기에 지나치게 돈에 집착하지 않고, 돈을 벌더라도 이웃에게 베풀 줄 알며, 돈에 목숨까지 거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

    자칫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 단멸상에 빠지게 되면 너무 공에 집착하여 눈에 보이는 형상과 세계의 질서, 사회의 관습 등을
    완전히 무시하고 ‘본래 아무것도 아니다. 다 텅 빈 것이다.’라는 생각만 앞세워행동도 마음대로 하고, 현실을 무사안일하게 보내게 되는 수도 있다.

    또한 더 나아가 ‘수행도 다 필요없다’거나, ‘경전도 다 필요없다’거나, ‘절하고 염불하고 좌선하는 것도 다 쓸데없는 짓이다’거나 하면서 형상을 완전히 무시하는 경우도 종종 있고, 자신이 완전히 다 깨달은 양 스스로 착각에 빠지는 수도 있으며 또한 그런 신념이 강해지면 그러한 신념으로인해 보여지는 몇몇가지 환상에 빠져 정법과 멀어지는 경우도 더러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단멸상에 치우치면 세상 사는 일이 갑자기 공허해질 수도 있다.

    돈 버는 일이며, 사업하는 일이며, 사랑하는 일이며, 심지어 깨달음을 얻는 일까지 모든 것이 다 공허한 것 같고, 다 필요없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아등바등 사는 모습이 어리석게 보이고 다 소용없는 일이라 여긴다.
    그렇게 되면 삶은 빛을 잃는다.
    삶의 의욕이 사라지고 하루 하루 사는 것이 힘에 겹다. 모든 의욕이 상실되고 만다.

    스스로는 공을 깨달아서 그런다고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공이라는 것은 그렇게 빛 바랜 희뿌연 퇴색이 아니다.
    오히려 공을 깨닫고, 무아상을 깨닫게 되면 우리 삶은 더욱 ‘지금 이 순간’에 선명하게 집중된다.

    과거나 미래에 치우친 생각과 분별들을 오직 ‘지금 여기’에 투영함으로써 온전히 100% 생동감있게 순간을 살게 된다.

    그것은 현상계가 모두 공하여 텅 비어 있지만 그러한 텅 빈 가운데 충만한 빛을 보기 때문이다.
    텅 빈 충만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뒤의 충만을 보지 못하고 앞의 텅 빈 소식만 알음알이로 알게 되면 이렇듯 깊은 침체에 빠지고 만다.

    삼라만상 우주법계가 모두 텅 비어있다는 것, 공하다는 것, 실체가 없다는 것, 일체 모든 상이 다 허망하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도리어 충만하다는 것, 꽉 차 있다는 것, 저마다 실체요 저마다 제각기 다 부처라는 것,
    일체 모든 존재가 그대로 참빛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단멸상에 치우쳐서도 안 되지만 나아가 상견론에 치우쳐서도 안 된다.
    항상한다는 견해에 치우쳐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텅 비어 있지만 불성이나 자성불, 본래면목, 참나는 존재한다고 하는 견해
    또한 치우친 생각일 뿐이다.

    그것도 다 언어이고 말일 뿐이며, 단멸론에 치우침을 막기 위한 방편의 말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불교에서는 흔히 자성을 깨쳐야 한다거나, 불성을 보아야 한다거나, 자기 안의 참나를 바로 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러한 말의 의미를 잘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이 곧 참나, 불성, 자성은 고정된 실체여서 그 실체를 잡아야 한다는 말로 오인하면 안 된다.
    그것은 말로 표현될 수도 없고, 있다 없다로 나눌 수도 없으며, 크고 작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그 어떤 표현으로도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있다고 생각지도 말고 없다고 생각지도 말 일이다. 있다고 생각하면 상견에 치우친 것이고 없다고 생각하면 단멸에 치우친 것이니 여기에 말의 어려움이 있다.
    생각으로는 다 해 마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어느 한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가르침, 어떤 극단으로도 생각을 치우치지 않는 무분별과 무심의 가르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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