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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을 받지도 않고 탐내지도 않는다
    金剛經 2012. 2. 28. 06:43

     

    받지도 않고 탐내지도 않는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항하의 모래수 만큼의 세계에
    가득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했다 하더라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일체 법이 무아(無我)이고 무생(無生)임을 깨달아 얻었다면
    이 보살이 얻은 공덕은 앞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뛰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모든 보살들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사옵니까?”
    “수보리야, 보살은 복덕을 짓더라도
    그 복덕을 탐내어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복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불수불탐분은 보살이 온갖 공덕을 짓고도 그 공덕을 받고자 하는 생각도 없으며,
    공덕을 탐하지도 않는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공덕에 대해 탐하지 않으며 받지도 않기 때문에 그 공덕은 참으로 뛰어날 수 있는 것이다.
    탐내어 집착하지 않으면 받아도 받는 것이 아니고, 받지 않더라도 고스란히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항하의 모래수 만큼의 세계에 가득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했다 하더라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일체 법이 무아(無我)이고 무생(無生)임을 깨달아 얻었다면 이 보살이 얻은 공덕은 앞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뛰어난 것이다.

    여기에서는 무아이고 무생이라고 번역함으로써 산스크리트와 현장스님의 번역을 따랐다.
    구마라집은 무생을 생략한 대신 ‘인을 이룬다’고 번역하고 있고, 산스크리트 본에서는 ‘무생의 법에서 인욕을 성취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의미하는 말로, 구마라집이 번역한 ‘인’이라는 것도 무생법인을 줄인 표현이기 때문에
    무생을 생략하고 ‘인을 이룬다’고만 번역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무생법인의 인이란 화엄경 십인품에서는 ‘지혜’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으며, 일반적으로도 무생법인이라고 하면 무생,
    즉 불생불멸을 깨닫는 지혜, 깨달음 정도의 의미로 쓰이고 있으나 산스크리트 본에서는 ‘무생의 법에서 인욕을 성취한다’고 하여 ‘인’을 인욕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인욕’의 의미는 각묵스님의 책에서 보여지고 있듯이 당시 인도에서 아트만, 브라흐만 등의 고정된 자아 개념이 전반의 흐름이었던 시대에 그와 정면으로 반대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무아와 무생의 가르침을 따르는데에는 그만큼의 용기와 인욕이 필요했었기에 무생의 가르침에서 인욕을 성취한다는 산스크리트 본의 해석이 가능한 것이었으리라고 본다.

    무아란 고정된 실체로써의 자아가 없음을 여실히 보는 것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겉모습의 ‘나’라는 모습은 인연따라 잠시 만들어진 몽환포영(夢幻泡影)에 불과하며 공한 것일 뿐이란 의미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바로 이 점, 무아의 체득에 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괴로움의 실상은 ‘나’라는 것을 실재시 하는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고정된 실체로써의 자아가 어디에도 없다면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 또한 실재적인 것이 아닌 다만 꿈처럼, 환영처럼, 그림자처럼 잠시 인연따라 나툰 것일 뿐이다.

    우리 눈에는 생멸이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불생불멸이요 무생인 것이다.

    이러한 무아와 무생의 깨달음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이다.

    그러니 항하의 모래수 만큼의 세계에 칠보로써 보시한 공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아와 무생을 깨닫는 공덕에는 미치지 못한다.

    무아와 무생을 깨닫는 공덕은 온갖 공덕을 뛰어넘는 공덕 중의 공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실은 공덕이라고 이름붙일 수도 없다.
    공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깨닫지 못했을 때 깨닫고자 하는 생각이 있고, 중생과 부처라는 차별이 있는 것이지, 이미 깨닫고 보면 중생과 부처의 차별도 없으며, 깨닫고 깨닫지 못했다는 차별도 사라진다.

    오직 이 세상에는 깨달음 밖에 없다. 그러니 깨달음이 많다 적다라고 할 수도 없고, 깨달았느니 깨닫지 못했느니 하는 말도 사라진다.
    오직 이 세상은 깨달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얻기 이전에는 공덕이 있고 없을 수 있지만,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는 오직 공덕 그 자체이기 때문에
    공덕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많다느니 적다느니 하는 말도 사라진다.

    그래서 깨닫고 나면 공덕을 받아도 받는 것이 아니요, 받지 않더라도 받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오직 공덕 그 자체이며, 복덕 그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말한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모든 보살들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사옵니까?”
    “수보리야, 보살은 복덕을 짓더라도
    그 복덕을 탐내어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복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는다.
    이 말은 보살은 복덕을 받으려는 생각이, 분별이 없다는 말이다.
    복덕을 받으려는 것은 중생심인데 어찌 보살이 복덕을 받으려는 생각이 있겠는가.

    복덕이 없는 이는 보다 많은 복덕을 받으려고 애쓰겠지만, 오직 한량없는 복덕 그 자체인 보살이라면
    복덕을 받을 생각도 없고, 받을 필요도 없으며, 복덕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촛불이 불을 한없이 나누어 줄 수는 있을 지언정 이미 켜진 촛불이 다른 촛불들에게 촛불을 나누어 달라고 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이미 환히 켜진 촛불이라면 다른 불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받는 것이 아니고, 받을 필요도 없으며, 받는 안 받든 상관이 없는 것 아닌가.

    마찬가지로 보살은 한량없는 복덕을 짓고 베풀지만 스스로 그 복의 결과를 더 많이 받고자 애쓸 필요가 없다. 더 많은 복덕을 받고자 탐내어 집착할 것도 없다. 그래서 모든 보살들은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보살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구할 것이 없으며, 얻을 것도 없다.
    받을 것도 없고 탐할 것도 없다.
    이미 다 구족되어 있는 줄 아는 까닭이다.
    깨달음도 복덕도 행복도 평화도 이미 그 자리에 있다.

    이는 비단 보살에게만 한정된 가르침이 아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중생일지라도 사실은 원만구족하다.
    행복이란, 복덕이란, 깨달음이란 사실은 애써 구해서 얻을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다만 많은 사람들은 이미 주어진 선물에 만족하지 못하고, 애써 더 많은 것을 채우려 하고, 애써 번뇌와 분별을 일으키며,
    욕심과 집착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본래 원만구족하던 사람들이 스스로 부족하고 괴롭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이미 충분한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욕심과 집착을 일으켜 스스로 고통을 불러오는가.
    그 원인은 ‘나’라고 하는 아상 때문이다.
    ‘나’라는 것이 진짜로 있는 줄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무아를 모르기 때문이다.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내 것’을 더 늘려 나가려 욕심 부리고 집착을 하며, 언제까지고 ‘나’를 유지시켜 나가려는 생각 때문에 죽음을 괴로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그러나 무아를 깨닫고 나면 나고 죽는 것도 없는 무생은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닌가.

    결국 무아와 무생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더 많이 채우려고 하고, 더 많이 탐내어 집착하며,
    더 많은 공덕, 복덕에 집착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무아와 무생에 대한 깨달음이 생긴다면 더 이상 공덕에 집착하지도 탐착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 무아와 무생을 깨달은 자가 바로 보살이다.

    그러니 보살은 복을 받을 것도 없고, 탐내어 집착할 것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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