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윤회계의 왕따, 아수라의 몰락
    #佛敎 2012. 2. 8. 06:59

     

     

     

    인드라 아수라 인도신화에 등장하는 신이다.
    인드라는 '힘의 신' 제석천이고, 아수라는 '정의의 신' 아수라왕이다.
    그런데 인드라는 청년시절에 아수라의 딸 스쟈의 미모에 반해, 강제로 그녀를 범하고 자신의 궁전으로 데리고 갔다.
    격노한 아수라는 인드라를 공격하였으나 번번히 지고 말았다. 왜? 인드라는 힘의 신이었으니까..

    인드라와 스쟈는 훗날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수라는 끝끝내 용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수라는 '정의의 신'이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정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에게는 스쟈의 현재의 행복보다도 정의를 위반한 제석천의 과거지사가 더 문제였다.
    아수라는 인드라와 싸워 몇 번을 져도 그래도 집요하게 싸움을 계속했다.
    그 결과 그와의 싸움이 귀찮아진 인드라는 마침내 아수라를 신의 세계에서 영원히 추방해 버렸다.
    아수라는 악마의 신이 되고 말았다. 정의에 집착한 나머지 남을 용서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아수라였다.
    이렇게 아수라는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전쟁의 신'으로 불리기도 한다.

    반면에 제석천은 패전의 위기에 몰려 후퇴하다가 새둥지를 발견하고는
    '애꿎게 저 불쌍한 새들을 죽이느니 차라리 내가 죽겠다'는 각오로 군대를 돌리는 자비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제석천은 불교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선신이 되었다.
    만일 도망치던 이가 아수라였다면 눈 앞에 새집이 있다고 했을 때 어떻게 했을까?
    '정의의 이름'으로 밀어붙이지 않았을까..

    제석천과 아수라, 둘 다 신(神)의 세계에 있었다.
    육도윤회에서 신(神)은 인간계(人)보다 우월한 곳이다.
    그럼 신의 세계에서 추방된 아수라는 어디로 갔을까?

    <1>원래의 지위는 천상계 -- 육도 6가지 중에 1위(位)
    <2>육도를 설명할 때, 천상, 아수라, 인간.. 의 순서로 말하기도 한다. -- 2위
    <3>금강경에선 '천,인,아수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 3위
    <4>윤회의 여섯 갈래에서 좋은 곳 세 군데를 꼽아 삼선도(三善道)라 하면 천상, 인간, 아수라를 지칭하는 말이다. -- 좋은 3위
    <5>그런데 나쁜 곳 네 군데를 꼽아 사악도(四惡道)라 하면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를 지칭하는 말이다. -- 나쁜 3위
    <6>천수경에선 '지옥, 아귀, 수라, 축생..'의 순서로 나열하고 있다. -- 4위

    도대체 그 추락의 끝은 어디인가? 아수라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가?
    여기에 그 답이 될 만한 자료를 하나 소개한다.

      아수라(asura)는 '용모가 추하다, 추악하다'라는 의미이다.
      천복(天福)은 지어 누리지만 천덕(天德)을 짓지 않아 생기는 세계인데,
      범부가 계율을 잘 지키고 보시 공덕은 지었으나, 화내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화내는 마음이 치성하고, 아만심이 높고 강하며, 악한 마음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가 된다.
      이런 중생들은 항상 싸우기를 좋아하는 무리로, 아수라도의 중생으로 태어난다.
      능엄경 제9권에서는, 아수라는 아귀, 축생, 인간, 천상의 4도에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그랬다.
    알고보니 윤회의 육도(六道)라는 개념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원형은 5도 윤회라고 한다. 거기에 수라를 포함시켜 6도 윤회가 된 것이다.
    이제 그동안 아리송했던 의문들이 정리되었다.

    아수라는 정의의 신이었지만 분노에 사로잡혀 결국 악의 화신이 되고 말았다.
    정의의 신이 악의 화신으로 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하지 아니한가?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전쟁과 학살이 정의라는 명분으로 행해졌던가?
    얼마나 많은 핍박과 폭력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됐던가?
    아수라의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한번 느끼게 된다.
    불교에서 자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불교에서 분노를 얼마나 싫어하고 경계하는지..

    그리고 정의와 자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수라의 얘기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소동파의 일화가 있다.
    소동파는 과거를 볼 때, 군자의 정의와 자비에 대해 논하라는 문제에 이렇게 답을 했다.
    '군자(王 통치자)의 자비는 얼마든지 자비로워도 좋다. 그러나 정의는

    정의를 너무 강조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정의가 지나치면 잔인해지기 때문이다.'
    그때 시험관이던 당대의 대문장가 구양수는 이 답안을 보고
    '난 이제 집에 가야겠다'며 극찬을 했다고 한다.
    정의가 자비를 잃어 끝없이 몰락한 아수라..
    바로 그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또, 요즘 베스트셀러 중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서 저자 마이클 샌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의란 '미덕(美德)을 키우고 공동선(善)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미덕과 선.. 여기에 자비가 없다면 과연 미덕이고 선일까?
    정의를 말하면서 결국 자비를 강조하고 있지 아니한가?

    제석천 인드라는 힘의 신이었다.
    힘은 지혜에서 나오며, 힘은 자비롭게 쓰여야 한다.
    불교의 두 기둥은 지혜와 자비이다.
    지혜 없는 자비는 무기력한 자비일 뿐이고
    자비 없는 지혜는 무자비한 지혜일 뿐이다.
    지혜는 자비를 더욱 향기롭게 해주고
    자비는 지혜를 더욱 빛나게 해준다.
    자비를 잃었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나의 견해를 세우고 집착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윤회계의 왕따 아수라는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음공부를 하는 수행자들에게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에게
    제자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위정자들에게
    아수라는 따끔한 경고이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