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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마를찾아 서쪽으로 간 이유?(미황사)
    ♠寺刹巡禮 2011. 12. 18. 00:46

     달마산(達摩山, 489m)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기암괴석이 수려한 달마산은 백두대간의 맥이 마지막으로 솟아올라 이루어진 두륜산의 끝자락에 이어진 산으로 이곳의 지맥이 바다를 통해 한라산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미황사의 창건과 관련한 기록으로는 1692년 (숙종18)에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1634~1692)이 지은 미황사사적비(美黃寺寺蹟碑)가 있다.

    미황사의 옛 통도사 터에 있는 이 사적비는 창건시기와 창건연기설화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749년(신라경덕왕8)에 의조화상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미황사는 고려시대 지원년간(旨元年間)(1264~1294)에 남송(南宋)의 달관(達官) · 군자(君子)등이 미황사에 내왕하며 부흥기를 맞았으며 조선전기에도 그 사세를 꾸준히 유지해왔다.

    미황사의 조선시대 연혁은 1754년(영조30)에 기록된 미황사법당중수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상량문은 1982년 대웅전 복원공사 때 발견된 것으로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 3차례의 중건이 있었다고 한다.

    첫번째 중건은 1597년(선조30)정유재란 때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어 다음해부터 공사를 시작 1601년에 마무리되었다. 이때의 불사는 만선(晩善)스님이 담당했다. 그 뒤 1658년(효종9)에서 1660년(현종1) 까지 두번째 중창이 이루어졌으며, 이때는 성간(省侃) · 수신(脩信)스님이 담당했다. 그리고 세 번째는 1751년(영조27)에 덕수(德修)스님에 의해 시작되어 상량문이 씌어진 1754년에 마무리 되었다. 이때의 불사내용은 1751년 동서 양쪽에 금고각(金鼓閣)을 세우고 이듬해 기와를 바꾸었으며 1751년에는 보길도에서 목재를 실어 왔고 대흥사와 마을에서 공사를 도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듬해 대웅전과 나한전을 완공했다.

    1754년(영조30)에 여고(女古)가 4번째 중창을 하였으며 당시 대웅전의 대들보에서 묵서명이 나왔다. 그 기록에 의하면 나한전(응진당)은 1761년(건륭16년)3월 26일에, 대웅전은 같은 해 4월 11일에 각각 상량이 된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로보아 대웅전과 응진당은 18C에 건립된 전각임을 알 수 있다.

    한편 18세기에는 고승 연담유일(蓮潭 有一)이 이곳에 머무르며 활발한 활동을 폈다. 연담은 특히 절이 바닷가에 위치하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 물에 빠진 사람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수륙제를 지내기도 했다. 그래서 연담의 문집인 「임하록(林下錄)」을 절에서 1799년(정조23)에 펴냈으며 스님의 입적 후 부도가 세워지는 등 연담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19세기 후반인 1858년(철종9) 에는 영허의현(靈虛義玄)이 이곳에서 만일회(萬日會)를 개설하기도 했다. 이때의 만일회는 아미타신앙의 법회였다고 하며 이같은 내용은 초의선사가 지은 미황사만일회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미황사는 옛날에 통교사를 비롯 도솔암, 문수암, 보현암, 남암 등 12암자를 비롯하여 전각이 20여동이나 있었던 대 사찰이었다고 한다.

    미황사에는 현재 미황사와 관련된 고승들의 부도 28기, 탑비 6기가 경내에 있어 조선후기에 활발한 전법도장(傳法道場)이었으며 사격(寺格)이나 사세(寺勢)가 매우 융성하였음을 보여준다.

    미황사는 이러한 융성을 거듭하다 이 고장 북평면 출신 주지인 혼허(渾墟)가 절의 중창을 위해 모금차 군고단을 이끌고 완도 청산도를 가다 배가 조난당하여 젊은 승려들이 몰살당한 후 군고단 준비에 진 빛 때문에 쇠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황사 스님들의 12채 군고(진법군고)는 송지면 산정리 마을 사람들에 의해 전승되어 오고 있고, 진법군고의 깃발에는 바다거북이 등에 올라탄 삿갓 쓴 스님이 그려져 있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달마대사

     

     

     

     

     

     

    미황사의 창건을 기록하고 있는 미황사사적비에는 미황사의 창건과 관련한 연기설화가 전한다. 이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8년(749)에 홀연히 한 석선(石船)이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지금의 송지면 갈두리)에 와 닿았다. 그런데 배 안에서는 하늘의 음악과 범패소리가 들려나와 한 어부가 이를 살피려 하자 이때마다 번번이 배가 멀어져갔다.

    이곳 달마산에서 수도를 하고 있던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이를 듣고 장운(張雲) · 장선(張善) 두 사미와 더불어 촌주 우감, 향도 일백인과 함께 가서 목욕재계하고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석선이 해안에 닿았는데 그곳에는 주조한 금인이 노를 잡고 서 있었다.

    배 안에는 금자(金字) 화엄경(華嚴經) 80묶음, 법화경(法華經) 7묶음, 비로자나, 문수보혈 40성중(聖衆), 16나한(羅漢), 탱화 등이 있고 금환(金環)과 흑석(黑石)이 각 한 개 씩 있었다. 향도들이 경을 싣고 해안에 내려놓아 봉안할 장소를 의논할 때 흑석이 저절로 벌어지며 검은 소 한마리가 나타나더니 문득 커졌다.

    이날 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인도) 왕으로 여러 나라를 편력(編歷)하면서 경상(經像)모실 곳을 구하였는데 산 정상을 바라보니 일만불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마땅히 경을 싣고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경을 봉안 하여라’ 하고 일렀다. 이에 의조화상이 소에 경을 싣고 가는데 소가 가다 지쳐 처음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산골짜기에 이르러 다시 눕더니 미(美)하고 크게 울며 죽었다.

    소가 처음 누웠던 곳에 사찰을 지은 것이 통교사(通敎寺)요, 마지막으로 누워 죽은 골짜기에 사찰을 지어 성경(聖經)과 신상(神像)을 봉안하고 미황사라 했다. 이때 미(美)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취하고 황(黃)은 금인(金人)의 황홀한 색을 취해 미황이라 했다 한다. 이러한 창건설화는 바다를 통한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달마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대웅전보전은 단청이 거의 벗겨져 있어 화려함 대신 자연에 가까운 단아한 느낌이 훨씬 더 절을 고풍스럽게 하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기단은 막돌허튼층 쌓기를 하고 이 위에 연화문 초석을 놓았으며 기둥은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기둥이다. 무거운 지붕을 받쳐주는 배흘림기둥은 전형적인 조선초기의 건축양식으로 팔작지붕과 아름다운 대칭을 이루고 있다.

    대웅보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주춧돌로 그 위에 물고기, 게, 모양 등이 양각되어 있으며 조각된 동물문형은 토속적인 민간신앙이 불교와 만나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양은 이곳의 부도에도 나타나 미황사의 독특한 양식을 느낄 수 있다.

    대웅보전은 1598년 중건된 뒤 1754년과 1761년에 한 차례씩 중수되었는데 이같은 사실은 1982년 대웅보전 수리 당시 대들보에서 발견된 묵서(墨書)에서도 확인되었다.

    불단에는 조선시대 후기에 봉안된 것으로 보이는 목조삼세불과 최근 조성된 아미타·관음 · 대세지보살의 또 다른 삼존불을 비롯, 삼세후불탱화·칠성탱화·제석천룡탱화·산신탱화·독성탱화가 모셔져 있다. 또한 조선 말기에 쓴 왕비전하수만세 · 세자저하수천추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좌측 아미타불 중앙 석가모니불 우측 약사여래불

     

    닷집과 우물 반자

     

     

     

     

     천장곳곳에 그려진 1천분의 부처님 때문에 이곳에서 세번만 절을 올리면 한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고 한다. 부처님이 1천분이 이니 세번이면 삼천배가 되는 격이니 그런 이야기가 나온듯 합니다. 대웅보전은 창건설화에 나오는 배(반야용선)을 상징하기도 하고 중생게에서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는 반야용선을 상징하기도 한다.

     

     

     

     

     

     화반에 그려진 달마대사

     

     달마대사

     대들보에 그려진 천불상

     

    닷집

    석가모니불 모셔진 좌대의 문양

     

     

     해태상

     

     

     

     

     

     인연의 고리

     

     

     

     

     

     

    보물 제947호 대웅보전

     잡석을 쌓은 높직한 기단 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의 둥근 기둥을 세웠다. 그 위에 공포는 내사출목(內四出目)·외삼출목(外三出目)의 다포식(多包式)으로 결구했다. 제공의 쇠서는 위로 가볍게 올라간 모양으로 18세기 이후의 보편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마치 백골집(단청을 하지 않은 법당)같이 보는 모습은 그러하나 자세히 바라보면 고색단아 하면서도 그윽한 세월의 흔적들을 발견 할수 있다.

    대웅보전 내부로 들어 가면 다른 법당에서 볼수 없는 벽화화 닷집, 탱화, 익공들이 참배자를 완전히 압도할 수 있도록 아름답고 뛰어난 선조들과 선사님들의 예술의 극치를 느낄수 있었다.

    대웅보전의 재료는 다른 사찰과 다르게 느티나무를 사용해서 짓은 법당으로 나무결이 그대로 살아 있어 바라보는 이의 발길을 사로잡아았다.

    단청은 고색단아한 단청이 발하여 역사를 스토리텔링해주고 있었으며 추녀에 달린 풍경이 둔탁하고 2개가 달린 모습이 이색적이였으며 대웅보전 정면에 용조각의 용한마리는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으며 한마리는 여의주가 없었다.

    아침일찍 초겨울의 눈발과 같이 하이얀 머리가 많은 젊은 보살님의 해박한 지식으로 미황사에 관한 간략한 소개를 받고 여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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