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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걸리 한 사발에 담긴 살맛
    ※잡동사니 2007. 11. 4. 10:31
    막걸리 한 사발에 담긴 살맛
    -그 다섯 가지 미덕을 따르면 '무병장수' 

    “자, 그만들 하고 새참으로 막걸리나 한 사발씩 허세.”
    “좋지!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구먼.”

    반가운 말 중에서 반가운 말이다. 한여름 팥죽 땀을 흘리면서 등이 휘게 농삿일을 하다가 총대(일의 우두머리)가 참을 먹자고 하면 입안에 침이 고인다. 허기진 배에서는 어서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을 콸콸 부어달라고 아우성이다.

    내가 막걸리를 처음 마신 건 아마도 초등학교 입학 전일 것이다. 한글보다 막걸리를 먼저 배운 셈이다. 큰 농사를 짓던 우리 집은 막걸리를 빚어 농주로 썼다. 워낙 술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농삿철이 아니라도 자주 술을 빚었다.



    내가 어릴 적에는 개인이 막걸리를 빚어 마시면 단속에 걸리어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런데도 개의치 않고 아버지는 “내 쌀로 내 술을 만들어 내가 마시는데, 왜 시비여?”하시는 배짱으로 버티었다.

    쌀로 밥을 해먹는 것이나 떡을 해먹는 것이나, 술을 빚어 마시는 것이나 뭐가 다르냐는 주장이었다. 세무서에서 밀주단속을 나와서 벌금을 물려도 그때뿐이었다. 자칫하면 인신구속까지 당할 일이었지만, 아버지는 별로 그런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때는 동네 창피하게 자꾸 그러시는지 몰랐다. 양조장이나 막걸리 판매소에 배달시켜서 마시면 될 걸 왜 자꾸.... 알고 보니, 그건 막걸리가 아니었다. 쌀 사정이 안 좋아 나라에서는 양조장에다 쌀 대신 밀가루로 막걸리를 빚으라고 했다. 그러니, 쌀막걸리의 전통적인 맛이 날 리 없었다.

    막걸리를 발효시키는 커다란 항아리가 안방 아랫목에 떡 버티고 있는 바람에 집안에는 술 익는 냄새가 진동했다. 시큼하면서도 노리끼리하다고 할까. 어릴 때부터 그 냄새에 익숙해져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막걸리를 대하게 되었고, 심심하면 항아리 뚜껑을 들추고 익어가는 술을 조롱박이나 나무 국자로 떠마셨다. 쇠그릇이 닿으면 막걸리맛이 변한다고 못쓰게 했다.

    막걸리의 진수는 백일동안 숙성시킨 백일주

    마시면 뭔가 짜릿한 기분이 들고 세상이 아른아른 하는 게 좋았다. 한두 번 그러다 보니까 맛을 들여서 초등학교 때부터 두어 사발 정도는 거뜬히 마실 수 있었다. 술꾼이 될 싹수가 짙은 거였다. 게다가 자연스럽게 술에 익숙해지니, 중, 고등학생 때에도 술을 마셔도 아무런 죄의식이 없었다. 너무 마셔 꼭지 돌지만 않으면....

    어느 명절 때인가는 쌀 한 가마니로 담근 막걸리 항아리를 아버지와 우리 형제 넷이서 통째로 비운 적도 있다. 밤새도록 권커니 잣커니, 술독을 털어 버린 것이다. 아마도 아버지는 하늘에서도 양조장을 하시거나 술 배급소를 하시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항상 술 주전자가 옆에 있다. 술과 함께 흥이 올라서 판소리나 육자배기를 한 자락 뽑으시다가 “너 한번 해봐라”라고 노래를 시키던 모습이다.

    우리 형제들은 잠을 자다가도 졸지에 일어나서 술시중을 들거나 노래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느 때는 밤새도록 시중을 들다가 졸면서 학교에 가기도 했다. "너도 마셔라"하시면서 딸아주는 술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하루종일 수업을 받는 게 아니라 헤롱헤롱 졸다가 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고 재미있지만, 그때는 괴로웠다.

    “나는 어른이 된 다음에 술을 마셔도 절대로 자식들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엉뚱한 다짐을 하곤 했다. 술을 안 마시겠다고 결심을 해야 그럴 듯하지 마시긴 마셔도 아이들을 귀찮게 하지 않겠다니.... 역시 부전자전, 피는 못 속이나 보다.

    막걸리는 탁주 또는 탁배기라고도 하는데, 원래 고두밥(술밥)에다 누룩을 섞어 빚은 걸 오지그릇 위에 걸치개(나무로 만든 받침)를 걸치고 체를 받치어 막 걸러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좋은 막걸리는 단맛, 신맛, 쓴맛, 매운맛, 떫은맛이 잘 어울리고 적당히 감칠맛과 청량감이 탁월해야 하고, 알콜 도수는 6도가 알맞다.

    막걸리는 적당한 온도와 숙성기간에 따라 품질이 달라진다. 급하게 만들어 바로 마시는 술로 일일주가 있는가 하면, 저온에서 백일을 숙성시킨 백일주는 향취가 좋고 보온성이 뛰어나 일년을 두고 마실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백일 가양주는 이제 빚을 줄 아는 솜씨 있는 사람이 드물어 구경하기 힘들다. 우리 집안에서도 둘째 형수만이 기법을 전수받아서 명절때 나를 즐겁게 한다.

    단군이 가을 수확후 제삿술로 썼던 막걸리

    막걸리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런 술이다. 막걸리에는 단백질과 비타민B 복합체가 들어 있어 피부미용에도 좋다. 미인이 되고 싶거든 막걸리를 마셔야 한다. 알맞게 들어 있는 알콜 성분은 혈액순환과 신진대사를 촉진해주고, 젖산, 구연산, 사과산, 주석산 등 이른바 유기산이 풍부해 피로를 없애주고 소화를 촉진한다. 보통 술은 독할수록 간에 부담을 주고 혈당치가 떨어지며 콜레스테롤 수치가 급격히 변화해 고혈압 등 성인병을 유발한다.

    그러나 막걸리는 그렇지 않다. 다른 주류와 달리, 상당량의 단백질과 당질, 콜린, 비타민B2 등이 함유되어 있다. 단백질과 당질은 혈당의 감소를 막아주고, 비타민B2와 콜린은 간의 부담을 덜어주며 영양실조를 예방해 준다. 잔 병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막걸리와 친해져야 한다.

    그뿐인가. 생효소가 많이 들어 있어, 고혈압, 심장병, 동맥경화증과 같은 순환기 질환성 성인병을 막아준다. 효모 속에는 일종의 항생작용을 하는 물질이 생성되어 암이나 바이러스 감염을 막아준다. 이런 연구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어, 우리 조상들의 지혜로운 술이 막걸리임을 다시 느끼게 한다.

    단군이 백성들에게 농사 짓는 법을 가르칠 때 가을에 새 곡식을 수확하면 높은 산에 올라가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에는 새로 농사 지은 곡식으로 만든 떡과 술을 제단에 올렸다. 햇곡으로 빚은 제주를 신농주(神農酒)라 했는데 이 신농주가 막걸리였다. 그런 연유로 지금도 농촌에서는 막걸리를 농주라고 부른다.

    우리의 대표적인 술이면서도, 막걸리는 파티나 손님 접대 등 그럴 듯한 자리에서는 양주, 와인 등 외래주에 밀려서 푸대접을 받기 일쑤다. 외래주는 잘 관리되고 고급재료를 마음껏 이용해서 품질을 향상시키는 데 비해 막걸리는 천대 받다보니까 고유의 맛을 잃고 품질도 들쑥날쑥이다.

    앞으로 감칠 나고 맛깔스러운 고유의 맛을 되찾아야 하고, 더욱더 품질관리를 잘해서 고급주로 향상시켜야 한다. 아무리 권장해도 제대로 맛을 못내면, 점점 막걸리는 하급주로 명토 박혀서 우리의 손에서 멀어질 것이다.

    막걸리에는 오덕(五德)이 있다고 한다.
     
    첫째 덕(德)은 허기, 즉 배고픔을 면해주는 것이고,
    둘째 덕은 취기가 심하지 않은 것이고,
    셋째 덕은 추위를 덜어주는 것이고,
    넷째 덕은 일하기 좋은 기운을 돋아주는 것이요,
    닷째 덕은 평소에 못하던 말을 하게 하여 의사소통을 시켜주는 것이다.
     
    다른 종류의 술도 비슷한 미덕이 있다고 할 수 있으나, 풋고추나 김치 안주만으로도 마실 수 있으면서 일하기 좋게 힘을 주는 술은 막걸리를 당할 만한 게 없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철철 넘치는 사발을 당기고 싶은 생심이 솟는다. 진짜 잘 담근 백일주 막걸리는 만나기 힘들지만, 그런 대로 마실 만한 집을 알고 있으니 퇴근길에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 같다. 갈수록 웰빙시대라고 하니, 전통 고급 막걸리의 화려한 부활이 멀지 않았다. 그 날이 오면, 산 좋고 물 맑은 자리에 벗들을 불러모아 도도하게 취흥을 즐기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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