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이란?
한국불교는 대승불교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웬일인지 소승의 성자인 나한 신앙이 널리 유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신통력 있는 기도 도량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전국의 내노라 하는 사찰이나 암자에서 나한님에게 소원을 비는 선남선녀들의 기도 소리가 낭랑하다.
그렇다면 나한이란 누구이고 그 신앙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 주된 기능은 무엇일까? 나한이란 아라한(阿羅漢 ; arahan, arhat)의 준말로 번뇌를 남김없이 끊은 부파불교 즉 소승불교의 최고 이상적인 인물을 가리킨다. 대승불교에서는 인간이 보살도의 실천을 거쳐 궁극적으로 누구나 깨닫게 되어 붓다가 된다고 하지만, 부파불교에서 볼 때 부처님은 오직 석가모니 부처님 한분 뿐이며,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고 경지는 나한〔아라한〕의 위치다. 물론 근본불교에서도 아라한이 번뇌를 끊고 이상적인 인간상이었다.
부파 불교에서는 그 아라한이 되는 길을 네 단계로 분류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성문 사과(聲聞四果)가 그것인데, 예류(豫流), 일래(一來), 불환(不還), 응공(應供)이다.
예류란 법의 흐름에 들어선 자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번뇌와 떠날 수 없는 생의 아수라장에서 튀어나와 번뇌를 멸하는 진리의 길로 한 발짝 내민 자를 일컫는다. 그 산스크리트 명이 슈로타판나(srotapanna)로서 음역하여 수다원(須陀洹)이라 한다.
일래란 법의 흐름에 들어서서 수행 끝에 욕망과 악의를 정복하고 이제 한번 다시 이 세상에 와서 태어나는 자를 말한한다. 그 산스크리트 명이 사크리다가민(sakrdagamin)이며 신라 시대 화랑의 이름이기도 했던 사다함(斯陀含)은 그것을 음역한 말이다.
불환이란 비록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라도 탐욕과 분노, 성욕 등의 근본적인 결함을 줄인 결과 더 이상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산스크리트 명은 아나가민(anagamin)으로, 이것을 음역하여 아나함(阿那含)이라 한다.
응공은 법의 흐름에 들어서서 모진 수행 끝에 모든 속박과 번뇌를 끊어버린 자로서 마땅히 공양받을 만한 자라는 뜻이다. 그 산스크리트 명이 아르핫(arhat)으로 아라한(阿羅漢)이라 음역한다. 그에게는 더 이상 윤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닦고 배울 것이 없으므로 무학(無學)이요, 진리와 합치하기 때문에 응진(應眞)이며, 모든 번뇌를 무찔렀기 때문에 살적(殺賊)인 것이다.
이러한 성문 사과는 기실 번뇌를 다스리는 순서에 따라 구분한 것이기도 하지만(사성제에 따른 구분으로 수다원 :見道, 사다함과 아나함 : 修道, 아라한 :無學道 ),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바로 번뇌에 물드는 길이기에 다시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염세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오로지 자신의 번뇌를 다스리는데 신경을 쓸뿐 타인의 구제에 대해에서는 별 관심이 없다.
나한 신앙과 갖가지 나한의 무리
이러한 나한의 자리적(自利的) 입장은 대승불교의 보살들이 추구하는 이타적(利他的) 입각지에서 호된 비판을 받는다. 대승불교에 들어와서 나한들은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보살들에게 빼앗긴 것이다. 대승불교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불보살들만이 거론할 뿐이다. 그러면 대승불교권에서 어떻게 나한에 대한 신앙이 일어난 것일까? 그 몇 가지 가설을 제시해 보겠다.
첫째, 스님은 거룩한 삼보 중에 하나로서 뭇 중생들의 귀의를 받는다. 고승 신앙, 조사 신앙 등은 모두 그 결과물이다. 고려 시대에 숫하게 행했던 그 스님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반승 법회(飯僧法會)를 보면 스님들에 대한 신앙이 어떠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 교단의 모든 나한은 사실 출가 스님들이 아닌가. 바로 그 나한들이 번뇌를 여윈 뛰어난 스님들었기에 신앙이 대상이 되는 것은 너무다 당연하다.
둘째는 나한들이 모두 부처님과 더불어 번뇌를 남김없이 끊은 성자라는 점에서 그들 모두는 존경의 대상이 된다. 사실 자신의 번뇌도 끊지 못한 사람이 상대방을 구제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셋째 복을 구하는 일반 민중들의 기복적 경향이다. 나한은 육신통(六神通)과 팔해탈(八解脫)을 갖추어 인간과 천인(天人)들의 소원을 속히 성취해 주는 복전이라고 하여 일찍이 신앙의 대상으로 된다.
넷째,『법화경』 「오백제자 수기품(五百弟子受記品)」에서는 5백 명의 나한들이 모두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는다. 그렇다면 그들 모두 귀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선 불교의 영향이다. 이에 대해서는 우매하라 타케시(梅原猛)의 논리를 빌어 소개해 보겠다. 그는 일단 소승의 나한과 대승의 나한을 구분한다. 대승의 나한이란 번뇌는 물론 남김없이 극복한데다 구속을 벗어나 무애의 경지에서 노닌다. 그는 있음과 없음, 긍정과 부정에도 집착하지 않는 대승불교의 자유인이다. 거기에서 광대한 자아가 꿈틀대며 일어선다. 선 역시 걸림없는 자유와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진정한 인간, 참인간을 내세운다. 여기서 선과 나한은 자연스럽게 결합된다.
특히 16나한도에 나타난 나한들의 모습을 보면 그러한 개성의 자유가 남김없이 드러난다. 그들은 하나 같이 노인의 모습인데 그것은 바로 모든 욕망에서 벗어난 탈속과 자유를 의미하며, 인간을 떠난 인간인 초인(超人)을 가리킨다고 한다. 바로 나한은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완전히 구현해 낸 대자유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그 개성이 강한 유유자적한 모습에는 竹林七賢의 잔영 또한 뚜렷하기에 노장사상의 영향도 지대했을 것이라고 한다.)
이들 나한은 집단적으로 무리를 짓거나 혹은 단독으로 신앙되고 있다. 5백 나한, 1천2백50나한, 16나한, 18나한, 부처님의 십대 제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여기에다 그 폭을 확대하여 조사 신앙이나 고승 신앙도 그 범주에 들어간다.
5백 나한은 왕사성 칠엽굴에서 제1차 경전 편집회의 때 참석한 그 5백 명의 나한들, 『법화경』에서 붓다가 되리라고 수기를 받은 500명의 나한, 그 밖에 경전상에서 부처님께서 5백 명의 나한과 함께 있었다는 묘사에서 나온 것이다.
1천2백50 나한은 최초로 재가불자가 된 야사 장자 아들의 친구 50명, 불〔火〕을 숭배하다 부처님께 귀의한 3명의 가섭 형제를 비롯한 1천 명, 사리불과 목건련을 따르던 무리 2백 명을 합친 말인데, 이들 1천2백50명도 『법화경』에서 수기를 받는 등, 부처님 법회 때마다 항상 따라다닌다.
16나한은 실존 인물이라기보다는 다소 상징적이고 설화적인 인물이라는 인상이 짓다. 이들에 대한 기원은 경우(慶友)가 저술한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경(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經)』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경전은 현장(玄濱)이 번역한 것으로 16나한에 대한 최초의 문헌이라 해도 좋다. 이들은 모두 인도풍의 이름을 가진 나한들은 중국인에게서 확실히 이국적인 냄새가 난다. 그들 하나하나의 특징을 서술한 것을 보면 인간을 초월한 인간이라는 인상이 물씬 풍긴다.
이 경에서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즈음 16명의 나한과 그 권속들에게 무상법의 진리를 부촉하셨는데, 그들은 불법의 멸함을 막고, 이후 미륵불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실 때까지 모든 중생의 복전이 될 것이라고 설한다.
18나한은 16나한 사상의 창조자 경우(慶友)와 16나한의 제1존자인 빈도로바라타(賓度盧頗羅墮隋 ; Pindolabharadvaja) 존자의 오해로 부터 생겨난 빈두로(賓頭盧 ; Pindola) 존자를 16명에 나한에 덧붙여져 생겨난 것이다.
한국의 나한 신앙과 그 문화
매일 아침 조석으로 올리는 예불문을 볼 것 같으면, 거기 십대 제자와 16성, 5백제대 아라한, 1천2백 아라한에게 귀의한다는 구절에서 바로 이 나한신앙의 구체적인 단면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나타난 나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가락국기」에 보이는데, 거기 김수로왕 도읍을 정한 뒤, '산천이 빼어나서 가히 16나한이 살만한 곳이다'라고 했다 하나, 그 당시에 나한 신앙이 들어왔다고는 도저히 볼수 없기에 다분히 글쓴이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의도적인 가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통일신라 시대에 보천(寶川)이 오대산에서 수도할 적에 북대인 상왕산(象王山)에서 석가 여래와 더불어 5백 나한이 나타났으며, 또 그가 임종 직전에 북대의 남쪽에 나한전을 두어 원상(圓像) 석가와 석가여래를 수반으로 하는 5백 나한을 그려 봉안하고 예참케 했다고 전하는데서, 나한 신앙의의 맹아를 찾을 수 있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 나한 신앙은 본격적인 유행의 물결을 탄다. 그 단적인 예로 고려 왕실에서는 5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비롯한 나한재를 자주 열어 기우(祈雨)와 적병 퇴치를 빈다 (왕실주관 28회)는 것이다. 수로왕의 나한에 대한 얘기도 사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열 스님이 살았던 고려시대에 그만큼 나한신앙이 팽배했던 사실을 그러한 기사로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왕실에서 주관한 반승법회을 보면 반승 5백, 내지 1천 명이라는 기록도 부지기한 것을 보면 나한 신앙의 한 형태로서 스님에 대한 신앙 또한 대단했던 모양이다.
태조 이성계도 왕이 되기 전에 이상한 꿈을 꾸고 무학 대사를 찾아가자 '나한전을 세우고 5백 나한을 봉안하여 5백 일 동안 기도하라'고 당부한다. 그는 이 말을 듣고 함경남도에 석왕사를 창건하여 500일 동안 기도를 거처 나한을 극진히 모신다. 이러한 분위기는 조선 시대에 그대로 이어져 기층민들의 나한 신앙은 최고조에 달한다.
나한들은 중생에게 복덕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키는데 독특한 능력이 있다고 하여 많은 나한전이 생겨나 거기에 나한들을 모시고 있다. 게다가 나한상 뒤에는 나한도를 현괘하여 현재까지 많은 나한상과 나한도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중에서 경북 영천 거조암(居組庵)의 5백 나한상과 청도 운문사 5백나한상이 유명하다. 특히 거조암의 5백 나한상 하나하나의 형상을 볼 것 같으면 모두가 개성이 강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참선하는 모습, 이를 들어내고 웃는 모습, 찡그리는 모습, 엉엉 우는 모습, 달리는 모습 등 다양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이는 개성은 강조하는 나한 신앙의 대표적인 예를 보여준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 5백 나한들은 영험 있기로도 유명하다.
응진전(應進殿)에는 보통 16나한을 많이 모셔 그 개성의 자유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특히 그 16나한도를 볼 것 같으면 도상이 다양하고 자유스러워 불교 회화에서 가장 예술성이 강한 분야로 떠오르고 있다. 그 탈속한 노인들의 근엄하고도 자유스러운 모습은 수묵(水墨)을 위주로하는 선화로도 많이 그려진다. 앞서 말했듯이 나한들은 바로 선의 이상 세계를 잘 구현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석굴암의 10대 제자상이나 여러 가지 조사상(특히 해인사 희랑대의 희랑 조사상), 스님 형태의 인물상 모두 나한 신앙의 다양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고승들에게 이들 나한은 대단하게 취급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진묵 스님은 나한을 부려 신도들의 소원을 들어준 일화로 유명하다. 여기에서 보이는 나한 신앙은 나한의 신통력에 결부된 소승 성자를 바라보는 멸시의 흔적이 은연중 드러난다.
현재에도 전국에 걸쳐 나한 도량이 많이 형성되어 있어 나한에게 복을 비는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관악산 연주암의 그 다락같이 올라선 응진전 16나한들은 영험이 아주 뛰어나 기도 인파가 그곳으로 수없이 몰리고 있는 와중이다. 주의할 점은 나한이란 인물이 계율을 지키는 데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그 성격 또한 괴팍하다는 이유로 나한재나 나한 기도를 올릴 때 특별히 몸가짐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