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이며 주변의 모든것 순하게 풀어 가는게 불교”
<사진> 스님은 자신을 낮추고 가족들을 부처님으로 모셔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다’를 죽여야 합니다.”
3월12일 오후 경주 함월사. 마당 한쪽에서 쓰레기를 정리하던 우룡스님은 불청객에게 차 한 잔을 내 놓고는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게 부처님
아침저녁으로 가족에게 삼배하라
그게 가장 진실한 예배다
“부처님을 멀리 갖다 놓지 마십시오.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게 부처님입니다. 내 곁에 있는 부처님부터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스님은 언젠가부터 부부간에 존경어가 없어지고 서로 하대(下待)하는 좋지 않은 풍토가 만연해 있다며 불자들에게 늘 이렇게 부탁한다고 했다.
“지금 가족들은 지나간 시간에 자주 만나면서 서로 좋아하고 서로 베풀다가 때로는 애를 먹이거나 크게 치고받고 싸운 인연으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그 지나간 생의 좋지 않은 버릇이 남아있습니다. 아무리 깊은 인연으로 맺어진 가족일지라도 ‘너 때문에’ ‘네가 그랬다’는 원망이 마음에 맺혀있기도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풀 수 있겠습니까?”
스님이 들려주는 가장 쉬운 방법은 ‘참회의 절’이다. 현생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법도 역시 ‘절’이다. 대학을 합격하고도 그동안 뒷바라지 해 준 아버지에게 감사의 인사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자녀에게는 어머니가 먼저 아버지의 고마움에 대해 인식시켜주고 ‘감사의 절’을 하게 이끌어 주는 것이다.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세생생 당신에게 잘못한 것 참회합니다’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염(念)하며 내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3배하며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꾸준히 삼배만 하면 해결됩니다. 이 아주 작은 정성이 가족 사이에 전해지면서 서로 존중하고 감사하는 마음도 생겨나게 됩니다.”
법당의 부처님과 ‘나와 내 가족이라는 부처님’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 이상 다행스런 일은 없다. 하지만 이렇게 되지 않는다면 법당의 부처님께 무릎을 꿇지 않더라도 내 가족을 향해서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 누구도 자기 가족 앞에서는 무릎이 잘 굽혀지지 않는다.
“당장 여러분들도 부인이나 자녀들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까? 잘 안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我)’라는 고약한 마음 때문입니다. 빛깔도 냄새도 없는 그 ‘나’ 때문에 가장 가까운 내 가족에게는 무릎이 안 굽혀집니다. 이 ‘나’가 죽어야 합니다. 불교의 수행방법도 이 ‘나’가 죽어야 사는 것 아닙니까? ‘나’를 죽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무릎을 굽히고 절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 ‘나’도 떨어져나가면서 수행도 한 발짝 더 향상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 ‘우리 가족’이 들어서야 합니다. 개인적인 ‘나’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 가족이라는 ‘나’, 우리 집.우리 사회라는 ‘나’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집이 바로 ‘나’고, 내가 사는 사회가 ‘나’이며, 여기의 주인 또한 ‘나’입니다. 나를 단속하면서 욕심 쪽으로 가지 말고, 고마움을 생각하며 고마움에 대해 나는 얼마나 보답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죽이면서 주위의 모든 것을 순하게 풀어가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며 그 가르침을 주춧돌로 삼아 ‘나’를 이기고 우리 집을 유지하고 사회를 유지하면 그 사람이야말로 불교를 올바로 믿는 불자라는 것이다.
“우리 집이라는 법당에서 내 가족이라는 부처님부터 잘 섬겨야 합니다. 우리 집이 바로 법당이요, 내 가족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내 가족이라는 부처님 앞에 삼배를 하면서 축원하십시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모든 것을 참회 드립니다. 용서합시오’ ‘당신이 건강하시고 당신이 바라고 원하는 일을 모두 성취 하십시오’ 이렇게 할 때 마음에 맺힌 것도 풀어지면서 집안의 운이 살아나고, 집안으로 복이 들어오게 됩니다.”
“거꾸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절에 와서는 고함이나 짜증 신경질을 부리지 않으면서, 내 가족이라는 부처님 앞에서는 짜증을 내고 소리 지르며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 “작은 고마움에도 두 손을 모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나에게 해주는 고마움, 내 아들이 내 딸이 나에게 해주는 고마움에 대해 합장을 하는 자세로 돌아가야 합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거의 모든 사람이 하루 세끼 밥을 먹습니다. 그러면서 감사의 인사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밥이 되기까지 하늘과 땅 등 모든 자연으로부터 얻어진 은혜와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에 대해 감사의 합장을 한 번이라도 하는 불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스님은 이런 자그마한 이야기부터 가족들 사이에서 주고받으며 생활 속에서 부처님을 느끼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까이서 합장이라도 주고받으며 ‘감사합니다’ ‘수고했습니다’ 이런 말 한 마디씩 주고받을 때 실제 부처님을 가까이하는 조건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버리고 무슨 불교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생활 속에서 부처님을 알고 그 정신을 실천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너무 모르는 우리의 현실을 깨우쳐주기 위함인지 스님은 때로는 격하게 때로는 반어법을 써가며 역설했다. 그러면서 ‘나는 늘 이렇게 유치원생 같은 소리만 한다’ ‘차 맛 다 떨어지겠다’며 분위기를 다시 돌려놓곤 했다. 그러면서도 잊지 않고 당부한다. 법신 비로자나불이 곧 대우주이며 그 주인인 자신과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는 부처님 사이에 말 한마디 행동하나 조심해서 다툼을 일으키지 말고 ‘늘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하라’고.
경주=김선두 기자 sdkim25@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함월사와 우룡스님 /
금자라가 달을 머금은 그 곳에서
전국으로 다니며 불자들 위해 법문
경주 남산의 한 쪽에 금자라가 달을 머금은 곳이 있다. 금오산(金鰲山) 함월사(含月寺)다. “금자라가 달을 다 먹어버리면 캄캄해지니 어두운 쪽으로 기울어지고 달을 그대로 내 보내면 너무 밝아 밝은 쪽으로 기울어지니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의미에서 스님이 직접 지은 이름이다.
대부분의 터가 암반과 썩은 돌이라 농사도 제대로 되지 않던 곳이다. 혼자 공부할만한 토굴로 생각하고 구입했는데 2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오가는 손님들을 위해 조금씩 손을 대다보니 설법전이 생기고 종무소 기능을 함께 할 만 한 요사채도 생겼다.
“문 하나 잠가버리면 방해받지 않고 살만한 곳이었는데 전부터 인연 있는 분들이 오면 앉은 자리도 마땅치 않아 법당을 만들고 밥이라도 나눠먹으려고 하다 보니 옆에서 도와주는 스님 골탕만 더 먹이는 결과가 됐다”고 함께 사는 대중들에게 미안함을 표했다. 스님은 기자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오가는 신도들에게 “잘 계셨습니까” “조심하시구요, 건강하십시오”라는 인사를 빠트리지 않을 정도로 다정한 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
1933년 일본에서 태어난 스님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1947년 해인사에서 고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55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으며 해인사에서 학봉스님으로부터 사집을 수학하고 고봉스님 문하에서 대교과를 마쳤다. “40살이 넘어서까지 은사 스님께 몽둥이로 주장자로 얻어맞았다”고 만 할 뿐 이외에 “더 붙이는 것도 꾸미는 것도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스님은 사진촬영조차 마다했다.
금오스님, 벽안스님도 내 상좌 남의 상좌 가리지 않고 잘못이 있으면 그 자리서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꾸짖어 주셨는데 돌아서면 다시는 그 일을 입에 담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스님은 “그런 어른들 속에서 어떻게 살아났다” 정도(正道) 이외 삿된 길, 사사로운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던 당대 큰스님들의 가르침 속에서 살아와선지 지금도 “큰스님 바꿔 달라”는 전화를 받으면 “그런 스님 없다”며 통화와 방문을 사양한다고 한다.
1963년 김천 청암사 불교연구원에서의 전강을 시작으로 화엄사 법주사 범어사에서 강사를 역임했으며 수덕사 능인선원, 직지사 천불선원, 쌍계사 서방장, 통도사 극락선원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50대 초반부터 울산 학성선원 조실, 경주 함월사 조실로 주석하면서 전국의 여러 법회를 통해 불자들과 늘 함께 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