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으로 내 안의 열반을 일깨우라
현실세계는 여전히 괴롭다. 일체개고다. 그러나 이상세계는 모습은 열반적정이다.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 열반은 너무나도 멀다. 열반은 다른 고차원적인 사람들 얘기고, 치열하게 정진하는 스님들 이야기며, 나와는 전혀 상관 없는 뜬구름 잡는 것이 되어 버린다. 실제로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포기하고 있는가. ‘적당히 복이나 짓고, 기도나 해야지 내가 어떻게 깨달음을 얻겠어? 열반이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고 나에게는 너무 멀어’ 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과연 그러한가. 열반이 그렇게 우리와는 먼 어떤 이상향이기만 한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기해야만 하는 그런 특별한 근기의 수행자에게만 열려 있는 좁은 문이기만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고맙게도 그렇지 않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고 보니 구제해야 할 중생이 없다고 하셨다. 이미 우리 모두는 깨달아 있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완전하며, 세상도 완전하다. 이미 우리는 부처요, 열반의 숲을 거닐고 있다. 이미 우리는 완전한 생명을 부여받았고, 완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누구도 완전한 평화, 완전한 고요, 완전한 행복을 부여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수행을 해서 깨닫고 난 다음 얘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린 누구나 완전한 부처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 도대체 이해되지 않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손사레를 칠지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불행하고 괴롭지 않은가. 그런데 어찌 이미 깨달아 있다고, 이미 열반적정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한단 말인가. 이제 그 의문을 차근 차근 풀어보자.
열반이란 쉬운 말로 표현하면 ‘완전한 행복’ 정도로 표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런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행복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돈이 많고,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높은 지위에, 수많은 온갖 소유물들이 넘쳐나는 그 상태를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은 아무 일도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는 충분한 재산이 있는 상태를 행복 혹은 열반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세계 제일가는 부자일지라도, 세계 제일의 권력자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행복한가, 그 사람은 열반이라는 큰 고요의 적정 속에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오히려 산 속에서 하루 한 끼를 연명하는 수행자에게서 적정을 볼 수도 있고,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의 끼니 걱정 없이 농사짓고 사는 농부 가족의 단란함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도 있다. 즉, 행복이란 외부적인 조건이나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똑같이 연봉 3000만원을 받는 근로자일지라도 어떤 사람은 그 속에서 행복을 누리고, 어떤 사람은 그 속에서 불행을 느낀다.
선방이나 수련원에서 정진하는 수행자에게 선방은 적정과 고요를 가져다 주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그러나 수행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이 끌려가듯 선방에 들어가 앉았다고 생각해 보라. 차라리 중노동을 할 지언정 하루 종일 한 두끼밖에 안 먹으면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만 있으라는 것이 바로 생지옥이 아니고 무엇이랴. 같은 조건에서도 어떤 사람은 행복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불행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어떤 특정한 조건이나 상황 속에 있는 것이 아님이 보다 분명해졌다.
그러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것은 어디에도 있다.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있다. 그렇기에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깨달음을 얻은 이는 지고의 안온과 평화를 느끼지만 그렇지 못한 이는 아무리 좋은 조건 속에서도 불행과 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 속에 행복과 적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행복이 깃들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 말은 다시 말하면 어디에도 행복은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불성은 어디에도 있으며, 다만 우리가 발견하지 못할 뿐이라고 하셨다. 열반, 적정, 행복, 평화는 이미 주어져 있다. 모든 상황 속에, 모든 조건 속에,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완전한 행복은 갖추어져 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깨달을 것인가에 있다. 행복을 누리지 못하던 마음 상태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마음 상태로 바꾸느냐에 있다. 열반적정이라는 완전한 행복을 보지 못하도록 막는 내 마음의 어떤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지금 이 자리에서 열반적정을 경험하고 누리며 만끽할 수 있다.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고 만끽해야 하는 것이다. 저 멀리 있는 깨달음을, 행복을 얻고자 애쓰고 노력하면서 추구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열반을 누리고 만끽하면 된다.
그러면 이제 어느 정도 준비 작업이 마무리 되었다. 열반은 어디에도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라는 대 전제를 깔아 놓자. 이 열반의 특성은 비움, 텅 빔, 공성(空性)이다. 앞에서 열반은 무상과 무아와 연기를 깨닫는 지혜라고 했다. 즉 이 세상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고 실체가 없으며 다만 인연 따라 잠시 꿈처럼, 환영처럼, 신기루처럼 오고 갈 뿐이라는 뜻이다. 그 말은 다시말해 이 세상에는 실체적인 그 어떤 것도 없으며, 텅 비어 있고, 공(空)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본래 텅 비어 있다. 본질에서 본다면, 진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텅 비어 있다. 지혜의 관점, 부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텅 비어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우리 중생의 관점에서 본다면 비어 있지 않다. 나도 있고, 남도 있고, 물질도 있고, 소유도 있으며, 모든 것이 우리 눈에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본래는 텅 비어 있던 세상이 우리 중생의 눈에는 왜곡되어 실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서 모든 문제는 시작된다. 실체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거기에 집착을 하고 탐욕을 부리며, 계산하고 따져서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를 생각하고, 이기심을 충족시켜 나가며, 소유와 지식을 늘려 나가고 있는가.
실체하는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온갖 지식과 욕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현대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배우고 또 배워서 남들보다 앞서가야 한다고 말하고, 더 많이 배워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앞서갈 수 있다고 말하며, 무엇보다도 성공해야 한다는 강한 집념과 용기를 가지고 남들보다 앞서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남들을 짓밟고 일어나는 것이 곧 성공이며, 남들과 함께 가는 것보다는 남들을 앞서가기 위한 온갖 지식들로 무장하도록 쇠뇌당하고 있다. 전혀 그것이 잘못된 쇠뇌인지도 모르면서. 이처럼 지식과 욕심을 찬양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사실 본 바탕의 진리에는 비어있음과 공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진리에 이를 수 있는지 답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 자신을 끊임없이 비워야 한다. 공에 가깝도록 비우고 또 비우는 작업을 해야 한다. 비웠을 때 열반이 가까워진다. 비웠을 때 내면 깊은 곳의 무한한 지혜의 가르침이 들려온다. 마음을 공의 상태로 돌려 놓았을 때 내면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불성(佛性)이 깨어난다. 삶을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내면의 부처님의 가르침들이 비로소 들려오기 시작한다.
사실 내 안 깊은 곳에서는 언제나 진리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내가 곧 부처이기 때문에, 사실은 지금 이 순간이 열반의 자리이기 때문에, 언제나 진리는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다. 다만 우리가 듣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그 진리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그것은 우리 안에 꽉 들어 찬 것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내면이 온갖 욕심과 집착과 성냄과 무지와 생각과 번뇌와 아상과 이기로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저 내면 깊은 곳에서 부처님의 맑은 음성이 들려오지만 그 위에는 더 많은 쓰레기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채워져 있으면서 소리치고 아우성치기 때문에 진리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진리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우리 내면의 불성을 일깨울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열반적정이 우리 삶에서 드러나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 있는가. 비워야 한다. 내 안에 꽉 차 있는 온갖 것들을 비워내야 한다. 말끔히 청소해야 한다. 정화해야 한다. 집착과 번뇌와 욕심과 아상들을 모조리 치워 버려야 한다. 모두 비워내서 맑은 공(空)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내면 깊은 곳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비로소 불성이 깨어나고, 열반과 적정의 소식이 내면의 뜨락에 가득 찰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디를 가든, 어떤 삶을 살든, 돈이 많든 적든, 어떤 조건 속에서도 항상 행복할 것이다. 항상 평안과 고요가 깃들게 된다.
열반에 모든 것을 맡기라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비움의 삶을 살지 못하고 채움의 삶을 살려고 애쓴다. 그렇기에 우리 삶은 더욱 채워짐으로써 조금씩 윤택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많은 채움을 얻고자 끊임없이 전 속력을 향해 질주하는 삶이 되고 있다. 그 질주는 멈추지 않는다. 빨리 달려야 더 빨리 완전한 채움에 이를 수 있고, 남보다 더 많이 채워 부자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부처님은 말한다. 그 무서운 질주를 멈추고 삶을 바라보라고.
이처럼 우리의 삶은 두 가지의 길이 있다. 비움의 길 혹은 채움의 길. 비움의 길은 진리의 길이며 부처님의 길이요, 채움의 길은 중생의 길이며 무지의 길이다. 부처님께서는 끊임없이 비움에 이르는 길을 우리의 내면에서 설법하고 계신다. 반면에 중생의 마음은 언제나 쌓고 채워나가는 길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이 두 가지 길이 언제나 우리 삶에 놓여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의 판단에 달렸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것인가, 아니면 아상과 욕망에 기초한 내 생각과 판단에 귀 기울일 것인가.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불성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음을 비웠을 때 찾아오는 열반과 적정의 소식은 어떤 방식으로 오는가.
그것은 일종의 직관(直觀)과도 같고, 어떤 영감(靈感)과도 같다. 우리는 직관적인 판단 보다는 생각과 기억과 지식을 조합해서 이끌어내는 판단이 더 정확하며, 더 과학적이고, 더 합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직관이나 영감은 도무지 믿을 바가 되지 못하며, 합리적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깊은 내면의 불성은 직관이나 영감 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삶의 지침을 매 순간 전달하고 있다.
우리가 더욱 신뢰하고 있는 생각이나 판단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따져보자. 생각이나 판단, 지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과거에서 온다. 과거에 배워왔거나, 들어왔거나, 익혀왔던 것들을 조합하고 비교 분석함으로써 결론을 낸다. 그 비교 분석의 결론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온갖 정보와 지식들을 찾고 공부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더 많은 양의 정보와 지식을 조합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찾아 가 묻고 배움으로써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에 더 효과적이고 과학적인 답변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그렇기에 삶을 올바로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배워야 하고, 지식을 늘려 가야 한다. 시간이 없다. 더 앞서가려면 더 많이 배워야 하고, 더 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꾸겨 넣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내린 결론이 항상 올바른 것일까? 만약 정보와 지식을 조합해서 내린 결론이 항상 올바르다면 많이 배운 교수나 높은 자리에 있는 경험 많은 경영자나 정치가의 결론이야말로 가장 뛰어나고 올바른 결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정치인들은 여당 야당을 나누어 매 순간 다툰다. 서로 옳다고 주장하면서. 서로 더 많은 정보와 전문가를 통한 지식을 쌓았기 때문에 더 올바른 판단일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가진 전문가 집단이 모인 정치판에서 야당과 여당의 의견은 언제나 엇갈린다. 그것은 대학 교수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그 분야의 전문가라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의견은 엇갈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는 그것 자체의 옳고 그른 것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옳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틀릴 수도 있으며, 나에게는 이 길이 최선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저 길이 최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직장을 취직하려는 사람이 공무원에게 조언을 구하면 공무원의 길이 얼마나 좋은지를 말해 줄 것이고, 자영업자에게 조언을 구하면 자영업이 얼마나 자유로운 것인지를 말해 줄 것이며, 선생님께 조언을 구하면 선생님의 매력적인 장점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그 사람들의 삶의 몫이며, 삶의 길이지 그것이 바로 나에게도 옳은 길인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의 ‘자기다운’ 삶의 길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자신만이 선택할 수 있으며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그러한 자기다운 나 자신의 삶의 몫은 내 안의 깊은 내면의 선택만이 나의 길을 열어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나의 길을 다른 사람이 판단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어떤 길을 가려고 해도, 어떤 사람은 긍정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반대할 것이다. 어떤 직장을 선택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긍정하고 어떤 사람은 반대한다. 모든 사람이 긍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지식으로, 정보의 조합으로, 기억이나 생각으로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안의 불성만이, 내 안의 근원적인 자아만이 자기답게 피어난 자신의 길을 가도록 이끌어 줄 수 있다.
생각이나 기억이나 지식은 겉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은 본질적이지 않다. 보다 근원적인 선택은 언제나 지식이나 생각이나 정보의 조합에 있지 않고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서 나온다. 다른 그 누구도 그 선택을 대신해 줄 수 없다.
절에 가서 스님들께 인생 문제를 상담해 보라. 사업을 확장해야 할지, 그만 두어야 할지, 혹은 이 직장을 선택해야 할지 저 직장을 선택해야 할지를 물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기억과 지식에 비춰 어느 한 길이 더 좋다고 조언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방법은 그렇지 않다. 불교의 방법은 지식과 경험과 기억을 모두 놓아버리도록 이끈다. 지식과 정보를 아무리 조합해도 전적으로 옳은 결론을 내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스님들은 문제를 상담해 올 때 어떤 특정한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그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내면을 바라보는 방법을 알려 줄 뿐이다. 답은 스님이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이 답을 내릴 수 있다. 스님들은 단지 그 방법을 알려줄 뿐이다. 그 모든 지식과 기억과 경험을 놓아버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자기만의 답변을 들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언젠가 한 사람이 찾아와 취직을 하려고 하는데, 두 곳에서 오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저히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몇 날 며칠을 생각하고 따져보고, 사람들 의견도 들어보고, 온갖 정보를 취합해 보았지만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어느 곳을 갔으면 좋겠느냐고 물어왔다. 당연히 결론을 나지 않는다. 그 비슷한 두 직장 가운데 어느 직장이 좋은지는 보는 견해에 따라, 취향에 따라, 사람에 따라 얼마나 다를 수밖에 없는가. 이 직장은 이것이 장점이지만 또 다른 점이 부족하고, 다른 직장 역시 하나는 좋지만 다른 하나는 부족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 주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비교 분석해 왔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면 이제 그 모든 지식과 판단과 분별을 다 놓아버려라. 어차피 그것들은 근원적이지 않다. 그것은 지식으로 경험으로 정보로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내면에서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지금까지 했던 모든 분별과 지식들을 놓아버려라. 욕심도 비우고 바람도 비우고 좋고 나쁜 모든 판단과 분별도 비워버리고, 오직 내면의 소리를 들어라. 차라리 또 다른 정보를 얻는데 쓸 시간을 비움을 위한 기도와 수행에 힘쓰라. 그리고는 모든 것을 부처님께 맡겨라. 결정해야 할 시간이 다가올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모든 판단을 비우도록 하라. 그리고 결국 둘 중 하나를 판단해야 할 때가 되었을 때 그 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마음 가는대로 저질러 발걸음을 옮기라.”
이 얼마나 비과학적인 방법인가. 아니 우리의 기존의 관념으로 보았을 때 이 말은 완전히 엉뚱하게 들린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과학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많은 생각과 지식들이 완전한가? 조금 더 깊이 삶을 유영해 보라. 조금 더 깊이 내면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 보라. 우리는 언제나 내 안에 불성이 있다고 말하면서 왜 내 안의 붓다와 직접적으로 만나는 것을 꺼려하는가? 우리는 분명 내 안에 깃든 다르마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 어떤 것이 진리이며, 어떤 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조언이고 판단인지를 다른 그 어떤 사람에게서도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바로 내 안의 붓다에게 법문처럼 들을 수 있다.
마음을 비웠을 때 비로소 내 안의 진리의 가르침이 피어난다. 텅 빈 공의 마음에서 직관과 영감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직관은 마음의 표면에 드러난 지식이나 정보나 기억이나 생각이 아니라 더 깊은 불성의 선택이다. 우리는 어떻게 더 많은 지식을 쌓고, 더 많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따지느냐에 노력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직관과 영감을 일깨우기 위해, 부처님의 소리를 듣기 위해 마음의 표면에 거추장스럽고 복잡하게 흩어져 있는 모든 기억, 생각, 지식, 욕망, 번뇌, 집착들을 놓아버릴 것인가를 위해 힘써야 한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지식과 기억과 생각에 휩쓸리며 이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삶의 방향키를 놓치고 산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 것인가. 당장에 본질로 뛰어들어야 한다. 당장에 어리석은 중생의 삶이 아닌 깨어있는 수행자의 삶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다. 생각과 지식과 욕망과 아상을 놓아버리고, 다만 단순하게 고요하게 느긋하게 여유롭게 삶을 관조하며 살면 된다. 악착같이 성공하려는 생각을 놓아버리고, 어떻게 되든 부처님께서 나를 이끌고 가라는 마음으로 내 안의 근본에 나를 완전히 내맡기고 살라.
열반적정이란 그런 것이다. 열반적정이 있다면, 그리고 그 열반적정의 삶이 내 안에도 있다면 마땅히 그러한 삶을 살아야지, 어리석은 괴로움의 삶, 일체개고의 삶을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열반의 삶, 적정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우라. 무상의 가르침에 따라 어디에도 집착하지 말라. 무아의 가르침에 따라 아상과 아집을 모두 비우라. 연기의 가르침에 따라 인연 따라 모든 것을 맡기며 살라. 열반적정의 가르침에 따라 열반의 삶에 나를 완전히 내맡기고 가라.
이처럼 깨달음이나 열반은 어떤 높은 곳에 있는 별다른 세계가 아니다. 바로 우리 삶 속에서 구현해 나가야 할 현실의 생생한 모습이다. 마음을 비우면 열반이 드러나고, 마음을 채우면 괴로움이 드러난다. 마음을 비우고 열반의 성품, 깨달음의 성품, 부처의 성품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자유롭게 주어진 삶을 살라. 내가 산다는 생각을 버리고 내 안의 불성이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주라. 생각과 지식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직관과 영감이라는 더 깊은 곳의 소리가 내 삶에 피어오를 수 있도록 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