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두려움은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이다.
    ◑解憂所 2012. 1. 8. 06:53

     

     

    두려움은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이다.

    고통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이 바로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벗어던지면 단지 아프다는 감각만이 남는다.

    1970년대 중반, 태국 북동부 오지의 가난한 숲 속 절에서 생활할 때, 나는 심한 치통으로 말할 수 없이 고통받고 있었다.

    근처에 치과 병원은 고사하고, 전화도 전기도 없었다. 심지어 약장 서랍에는 아스피린이나 해열진통제 한 알 없었다.

    숲 속 수행승은 무조건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병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듯이, 밤이 되자 치통은 훨씬 더 심해졌다.

    나 자신은 스스로를 꽤 강인한 수행자로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 치통은 내가 얼마나 강한가를 시험하고 있었다.

    얼굴 한쪽이 통증으로 마비가 될 정도였다. 그 나이 먹도록 그런 심한 치통은 처음이었다.

    아니, 그 이후로도 그런 치통은 경험한 적이 없었다.

     

    나는 호흡 명상을 통해 그 아픔을 이겨 내고자 했다.

    모기에 물어뜯길 때 호흡에 집중하는 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

    어떤 때는 온몸에 40군데가 넘게 물린 적도 있었지만, 한 가지 감각에 집중함으로써 다른 것을 잊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 치통은 단순한 통증과는 달랐다. 2,3초 동안은 호흡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금세 감각의 문을 걷어차고 뛰어들어 왔다.

     

    하는 수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 걷기 명상을 시도했다.

    그것 역시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걷기 명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숫제 '달리기 명상'을 하고 있었다.

    도저히 천천히 걸을 수가 없었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뜀박질을 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달려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 자리에서 뺑뺑이를 돌 뿐이었다.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다시 내 오두막으로 달려가 이번에는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염불을 외기 시작했다.
    불교에서는 염불에 초자연적인 힘이 실려 있다고 믿는다.

    염불은 행운을 가져다주고, 위험한 동물들을 물리쳐주며, 병과 고통을 낫게 해준다는 것이다.
    내게는 그런 믿음이 부족했다. 나는 과학도의 길을 걸었으며, 주문이나 염불이 마술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사기꾼들의 수법이라고 여겼다.
    그러한 나의 이성적인 판단과는 상관없이 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염불을 시작했다.
    그만큼 절박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곧 중단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나는 염불을 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소리를 지르고,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늦은 시각이라서 다른 수행자들의 잠을 깨우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런 식으로 계속 염불소리를 내지르다가는 수십 리 밖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깨웠을 것이다.
    통증이 극심해 도저히 정상적으로 염불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완전히 혼자였다.

    고향 집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 전혀 문명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은 까마득한 오지의 밀림 속에서

    아무 의지할 대상도 없이 견딜 수 없는 통증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온갖 방법을, 말 그대로 모든 방법을 다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어떤 것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상황이 그러했다.

     

    그처럼 완전한 절망 속, 어느 한순간 환하게 지혜의 문이 열렸다.

    일상적인 삶에서는 전혀 본 적이 없는 문이었다. 그 순간 그러한 문이 내 앞에서 열렸으며,

    나는 그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솔직히 말해,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나는 하나의 단어를 기억해 냈다.

    '내려놓으라..'

    전에도 수없이 그 단어를 들었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그것의 의미를 설명해 주기까지 했었다.

    내 자신이 그 단어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고 여겼었다. 그것이 바로 '착각은 자유'라는 것이다.

    끔찍한 치통을 잊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시도할 마음 자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생애 최초로 진정한 '내려놓기'를 시도했다. 말 그대로 완전히 내려놓았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에 나 자신도 놀랐다.

    그 고통스럽던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그 대신 크나큰 환희심이 밀려왔다. 환희의 물결이 온몸을 전율시켰다.

    마음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감미롭게, 깊은 평화의 상태에 자리 잡았다.

    이제는 아무 노력 없이도 쉽게 명상이 이루어졌다.

    이른 새벽 두세 시간 동안 명상을 한 뒤 나는 자리에 누워 잠시 휴식을 취했다.

    실로 달콤하고 평화로운 잠이었다.

     

    절에서의 일과를 위해 눈을 떴을때, 나는 치통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전날 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내려놓은 것은 치통의 아픔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그 아픔을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껴안았고,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것은 떠나갔다.

     

    내 이야기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몹시 아플 때 이 방법을 시도했지만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들은 나를 찾아와 불평을 하면서, 자신들의 고통에 비하면 내 치통이 별거 아니었던 모양이라고 지적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고통은 개인적인 것이며,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왜 그 방법이 효과가 없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나는 세 명의 수행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첫 번째 수행자가 '내려놓기' 명상을 시도한다.

    '내려놓으라..'

    그는 자기 자신에게 부드럽게 말하고 기다린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그는 다시 말한다.

    '내려놓으라..'

    그런 식으로 그는 자신에게 계속 내려놓으라고 강요한다.

    우스꽝스럽게 보이겠지만 우리 모두가 하고 있는 방식이 그것이다.

    엉뚱한 것을 내려놓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바로 '내려놓으려는' 그 마음이다.

    우리 안에서 사사건건 통제하려고 드는 그 감독관을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그 감독관이 누구인지 잘 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감독관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 수행자는 고통이 밀려올 때 이 충고를 기억하고 그 감독관을 내려놓는다.

    그는 고통과 마주앉아서 자신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상상한다.

    10분이 지나서도 고통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때 그는 마음을 내려놓아도 별 효과가 없다고 불평한다.

    나는 그에게 마음을 내려놓는 것은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방법임을 일깨운다.

    두 번째 수행자는 고통과 협상을 시도한 것이다.

    '내가 10분 동안 마음을 내려놓을 테니, 너 고통은 사라져 줘야 한다. 알겠지?'

    그것은 고통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세 번째 수행자는 고통이 찾아올 때 그 고통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고통이여, 네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하든 내 마음의 문은 너에게 언제나 열려 있다.

     안으로 들어오라.'

    이 세 번째 수행자는 고통이 원하는 만큼 충분히 머물도록 허락한다.

    설령 평생 머물러 있을지라도!

    그리고 그것이 더 나빠지더라도 거부하지 않는다. 고통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그는 고통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버렸다. 그것이 바로 내려놓는 것이다.

    고통이 머물러 있든 떠나든, 그에게는 아무 차이가 없다.

    오직 이때만이 고통은 사라진다.

    -아잔 브라흐마 스님-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