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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이, 바로 민중이고 신이고 부처니까.
    宗敎 단상 2011. 12. 25. 06:14

     

     

    인도 힌두교 신앙 안에는 별의별 신이 많기도 하다.

    주로 동물이 신의 탈것으로써 대변하는데, 그 중 신의 화신으로 소가 쉬바 신의 탈것으로 최고 큰 숭배와 존경의 대상이다.

    민중에게 최고의 인기가 있는 파괴의 신이다.

    창조주로써의 비쉬누 신은 금시조를 탈것으로 하며, 질서를 지키는 브라흐마 신은 백조를 탈것으로 한다. 

    코끼리, 원숭이, 뱀, 돼지, 공작, 호랑이, 몽구스 등등 이름도 모르는 온갖 짐승을 신의 화신으로 하는데 아예 샐 수도 없고 또 힌두교도가 아닌 우리로써는 참 이해하기가 곤란하기도 하다.


     그 중 희한한 게 바로 이 쥐를 섬기는 신전이다.

    우리들 관념으론 정말 이해가 안가는 신이 바로 이 쥐란 신인데, 이 쥐에게 바쳐진 건물의 쥐 사원이 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다는 쥐를 위한, 쥐님에게 바쳐진 거대하고 화려한 대리석 건물의 신전인 것이다. 

    신전 이름은 까르니마따 사원으로 인도 서쪽 라자스탄주의  데쉬노크란 마을에 있다.

    이른 새벽부터 신자들은 쥐들에게 올린다고 각종 맛 나는 음식을 올리는데 순간 수십 마리의 쥐들이 이 헌공물을 먹어 치운다.  그러고 난 뒤 신도들은 쥐들이 먹고 남은 음식물을 신의 축복으로 받아드리며 이걸 또 다 먹는다.

    이걸 어찌 이해하여야 될까?

     

    사년 전 델리의 한국 대사관에 일이 있어 내려갔다.

    좀 연세가 들어 보이는 어르신이 영사 업무를 보시는데 우리는 업무가 아닌 엉뚱한 이바구로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

    당신은 일부러 험하고 거친 인도 땅에 마지막 발령지로 누구도 오기 싫어하는 이 나라에 지원하여 일부러 왔고, 이 자리가 당신은 마지막 국가 공무원으로 정년퇴직 자리란다.

    왜 여기에 일부러 자원신청으로 왔는가?

    오기 전 한 국제공항 최고부서의 책임자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인생을 좀 더 뜻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양으로 온 것이니 아예 부인까지 대동하고 정말 큰 맘 먹고 인도에 들어 온 것이다.

    그 뜻 있는 인생길, 즉 삶의 영성(靈性)을 찾고 그 인생의 영성을 갖추기 위한 결정이 바로 인도 땅을 마지막 귀착지로 삼은 것이란다.

    그 연세에 용기도 대단했고 또 남은 세월 더 높은 지위나 더 많은 부를 멀리하고 뜻 있는 인생의 황혼 길을 찾는 것 자체가 신선했고 한편으로는 놀라움이기도 했다.


    오자마자 시간 내어 그 영성을 찾으러 방문한 곳이 바로 이 쥐 사원이었단다.

    그런데 막상 그 사원에 들어가서는 영성이고 뭐고 느낀 건 고사하고 함께 간 부인이 쥐떼들의 모습을 보고는 놀라 자빠져, 바로 그 자리에서 먹은 음식을 토하며 까무러칠 정도의 혼비백산의 상황으로 까지 번진 것이다. 

    그 이후론 어디 신전에 가는 것은 물론 인도 음식까지 먹을 수 없는 사태로 되어가다 끝내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인도에 적응을 못하고는 한국으로 철수 했단다. 
     
    “스님. 인도 어디에 가야 제가 구하려는 영성을 찾을 수 있을까요?” 
    “글쎄요. 인도 어디를 간다 해도 그 영성은 찾지 못할 겁니다.”
    “예?  아니 그럼 제가 인도 땅에 잘못 왔나요?”
    “아닙니다. 어딜 가나 지저분하기만 한 이 인도 대륙이 참고는 되겠지만 특별히 정해진 어디에 간다 해도 따로 찾으려는 그 영성은 보기 어려울 겁니다. 저 부터가 인도 땅에서 스무 해를 넘게 살았어도 그런 건 못 봤네요.” 하면서 처음부터 찾아 간 곳의 탄젠트가 어긋났다며 함께 웃곤 했다.

     

    우선 영성이란 어디를 간다고 또 어느 사원이나 신전 안에 있는 게 아니다.

    바로 우리 안에 있다.

    당신 몸이 바로 신전이고 그 안에 당신이라 할 그 순수한 영혼, 때 묻지 않은 바른 자아를 알아차릴 때이다.

    내적인 변화, 즉 스스로 변해야 되는 것이다. 

    내적인 깊은 침묵, 어디서나 자기희생이 따른 그 안에 이미 겸손과 인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인격체는 자기를 보고 스스로 자신을 다스릴 줄 알게 되기에 결국 신은 어디에 따로 있는 게 아닌 바로 인간, 민중인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흔히들 사원이나 신전 안에 가서 무릎 꿇고 기도한다고 하지만 신전 안 그 어디에도 신은 없다.

    사람이, 바로 민중이고 신이고 부처니까.

     

    역사적으로 신에게 올린다고 크고 많은 신을 위한 신전과 사원을 지어왔고 지금도 어디에서고 끊임없이 신의 이름으로 신전은 지어지고 있다. 

    과연 그렇게도 많은 신전이 이 땅에 있는데 그와 비례한  우리 민중의 삶이 행복하고 평화로운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욱 민중의 삶은 힘들어가고 그 민중들은 이제 그 크고 휘황찬란한 신전을 비웃고 있을 따름이다. 

     

    이미 곁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 새 신전을 짓는다는 것은 오직 신을 빌미로 하는 인간 도리도 못 지키는 성직자들의 비린내 나는 영업 수단일 뿐이다.

    그 신전이나 사원은 지금 이 시대의 가난하고 헐벗고 병들어 힘든 소외받는 민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몇몇 가진 자들의 결탁이며 위선이고 자기기만이다.

    그 많은 헌금이나 보시를 진실로 사람을 위한 일에 쓰여 진다면 거기에 영성이 있고, 민중은 행복해 할 것이며, 그 사회는 차별이 없는 신의 나라가 될 것이며 모두가 평등한 행복의 나라로 되어갈 것이다.

     

    이 열린 시대에도 끝없이 하늘나라 극락정토를 상품화 시켜 벌어지는 작태라니! 

    이미 종교가 직업이 되어버렸으며 변함없는 구매력을 지닌 상품이 되어 버려서 그 포장지만 바꿔가며 성직자들은 끝까지 기발한 비즈니스로, 수많은 신종 이벤트 사업을 이뤄내고 있다.

    외관으로만 성공한, 영성은 고사하고 사람 도리도 못 하는 게 이 시대의 누구보다도 악취를 풍기는 부자 성직자들이란 말인가. 한번 생각해 볼일이다.

    지금 이 시대에는 가난한 신전과 가난한 사원이 필요한 때이다.

     

    이 힘든 시대에 어느 때보다도 탁한 이 시대에, 맑고 청빈한 영성이 있는 그런 성직자들을 고대한다. 

    그런 고귀한 성직자들의 숨은 힘이 이런 험하고 탁한 세상을 맑힐 것이며 바로 그것이 힘든 민중의 희망인 것이다. 나아가 바로 인류의 빛인 것이다.

     

    -청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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