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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氣)싸움
    ♥일상사 2011. 12. 12. 06:48

     

     

    기(氣)싸움


    살다 보니 재미있는 모임이 있었다. 어떤 신문사 종교 담당기자가 연락이 왔다. 자기가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올리는 사람 16명을 초청해서 망년회 겸 저녁을 먹겠다고 한다. 나는 그곳에 글을 쓰지는 않았고 다만 내가 이 곳 저 곳에 써낸 글을 거기에 옮겨 싣도록 허락해 주기만 했다. 다만 열다섯 분만 초청하면 삐지기 좋아하는 내가 삐질까봐 내심은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인사차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내가 사는 곳이 강원도 오지이고 또 저녁모임인지라 끝나고 잘 곳도 마땅치 않아 불참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나를 잘못 보았다. 그의 예상외로 내가 시간 전에 참석을 했다.


    신성한 모임에 불청객이 아닌 청객은 청객이었다. 그 모임에서 나는 군계일학(群鷄一鶴)이 아닌 군학 일계(軍學一鷄)였다. 다 알고 있듯이 복장을 보나 잘생긴 것 빼고는 학력도 경력도 없는 무식하고 예의 없기로 유명한 돌파리, 촌놈, 농사꾼이다. 자칭, 타칭 그렇다.
    모인 이들의 학력, 경력이 대략 이렇다.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먹고 마시고 자고 싸고 쇼핑하고 친구와 만나고, 사랑하는 일 상 속에서 소박하고 자연친화적이며 행복한 삶을 가꾸어가는 30대 여성이다. 세상의 광고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을 위해 당당하고 행복하기 위한 단순한 생활을 늘 실행하길 즐긴다.

     

    *1988년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사람, 이웃과 세상에 보탬이 되는 보살의 삶을 서원하고, 단체를 설립했다. 기아·질병·문맹퇴치운동과 인권·평화·통일·생태환경운동에 앞장서는 실천하는 보살로서 2000년 만해상을, 2002년에 라몬 막사이사이상을, 2007년엔 민족화해상을 수상했다.

     

    *1991년부터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1998년 ‘소비주의 시대의 그리스도 따르기’를 위해 공동체를 만들어 실천적 예수운동을 전개했다. 소비주의 시대에 주체적 젊은이를 양성하기 위한 배동교육 실시했고, 5년 전 충북 단양 소백산 마을에서 일반 신자 가족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다.

     

    *전직 가톨릭 수사로, 인천에서 노숙자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국수를 나누는 국수집 운영하고 있다. 1976년 가톨릭 한국순교복자수도회에 입회해 1995년부터 전국의 교도소로 장기수들을 찾아다니다가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정사목위원회에 파견돼 출소자의 집인 ‘평화의 집’에서 출소자들과 함께 살았다.

     

    *1990년대 불교 개혁운동을 시작, 2000년대 들어 지리산살리기운동을 하면서 5년간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을 꾸려 전국을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다녔다. 지리산 어느 사찰에서부터 생명과 평화의 기운을 전국에 보냈고, 지금은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랬다’며 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근현대 한국 정신사의 한 획을 그은 함석헌 선생과 한신대·기독교장로회 교단 설립자 장공 김재준 목사 등 양대 거목으로부터 진리를 배운 신학자. 전 크리스찬아카데미원장이자 대학교 명예교수. 씨알사상연구원장을 지내며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교회 목회자. 그리 큰교회는 아니지만, 교인들이 성서뿐 아니라 다양한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고력을 지니게 하고, 냄비같은 신앙이 아니라 무쇠솥처럼 은근하면서 끈기있고 깊이있는 신앙을 갖도록 이끌고 있다. 생각이 깨인 젊은 기독교인들의 멘토이다.

     

    *목회자로서 기독교계의 <오마이뉴스>로 불리는 <뉴스앤조이>를 창간했으며, <씨알의 소 리>와 함께 민주화의 횃불이었던 <기독교사상> 주간이다. 오랜 신뢰를 바탕으로 깨어있고, 활력과 여유가 넘치는 이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는 마당발이다.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넘다드는 통찰력으로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서울대에서 철학을 미국 예일대에서 신학을, 하버드대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한 서강대 명예교수. 한완상 박사 등과 대안교회교회를 이끌었고, 최근엔 사재를 털어 강화도에 고전을 읽고 명상을 할 수 있는 ‘도를 찾는 공부방’을 열었다.

     

    *서울대 법대 재학 때부터 민주화에 투신 4년간 징역을 살고 나온 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겸손으로 진리를 향한 실험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정토회 불교사회연구소장을 거쳐 경기도 화성 야마기기마을공동체에 살았으며, 2004년부터 전북 장수의 산골로 이주해 농사를 짓고 된장·고추장 등을 담그며 산다. 서울에서 매주 ‘논어 읽기’ 모임을 이끈다.

     

    *가톨릭 신부가 되기 위해 광주 대건신학대에 다니다 송광사 방장 구산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22년 전 인도로 떠라 히말라야에서 달라이라마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매년 여름 히말라야 최고 오지인 라다크를 찾아 고립된 티베트 스님들과 오지 주민들에게 약과 생필품을 보시하고 있다. 어느 산악인보다 히말라야를 많이 누빈 히말라야 도인.

     

    *해인사로 출가했다. 오랫동안 한문 경전 및 선사들의 어록을 번역과 해설 작업, 그리고 강의를 통해서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했다. 또 대중적인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의 소통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행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해 문화관광부에서 사무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고교 때 체험한 신비체험을 규명하기 위해 공무원 생활을 접고 서울대에서 종교학을, 미국 라이스대학에서 종교심리학과 신비주의를 공부한 뒤’로 대학 HK(인문한국) 교수로 있다. 종교체험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 지 탐구중이다. 저서로 오강남 교수와 함께 나눈 얘기 모음인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가 있다.

     

    *서울 영등포구 신길5동 천주교살레시오수도회 마자렐로센터에서 봉사 중. 순간의 잘못으로 ‘6호 처분’을 받아 6개월간 소년원을 거쳐가는 소녀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치유자다. 사회에서 ‘문제아’라고 내모는 아이들에게서 더 큰 희망을 발견하는 수도자이기도 하다. 저서로 <너는 젊다는 이유 하나로 사랑받기에 충분하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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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과 잡지사 기자로 활동하다가 동양철학에 매료돼 원광대에서 기(氣)공학과 기(氣)학을 공부한 동양철학박사. 현재 인문기학연구소 소장으로 동양사상과 생활건강 및 명상에 대해 강의한다. 저서로는 한자의 강점인 회화적인 특징을 되살리고 글자에 담긴 역사적인 배경을 소개한 <브레인 한자>와 <한자실력이 국어실력이다>등이 있다.

     

    초청한 주체측도 그렇고 내 생각에도 워낙 여러 곳에서 많은 일을 하신 이름 있는 분들이라서 4-5명 아니면 6-7명 모일 줄 알았다. 나는 인사차라도 그곳에 초청받았으니 기어이 가보고 싶었다.


    한 자리에서 이름 있는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기대감이 있었고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도착하고 보니 아주 이름 있는 분 3-4명 빠지고 다 모였다. 모여 인사를 나누고 난 나의 느낌은 이렇다.

     

    첫째로 꼭 기(氣)싸움 하기 위해서 모인 것 같았다.

    건강을 우선으로 알고 지냈기에 나는 대략 그 사람 얼굴과 체격을 보면 건강상태를 알 수 있는데 그 곳에 모인 이들 중에 아무도 환자가 없었다. 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건강하다 못해 기가 넘쳐났다. 경전은 천수경, 불경, 성경, 성전, 사서삼경, 도덕경을 제각각 읽고서 깨달은 분들이다. 정진, 명상, 묵상, 기도하는 방법들은 제각기 달라도 수신(修身), 지지(知止), 능안(能安), 능려(能廬), 능득(能得)하는 과정들을 거치셨다. 격물치지(格物致知)하신 이들이었다. 꼭 길선비(道士) 전시장 같았다.

     

    둘째로 복장이 통일되어 있었다.
    물론 스님들은 승복을 입으셨고 원불교 교무는 그 나름대로 각 종단의 고유 의상을 입고 오셨다. 그 외 분들의 공통점이 유럽이나 서양 사람들이 정장에 베고 다닌  목을 둘러멘 기다랗게 접은 각색 헝겊을 메고 오신 이가 없었다. 다만 제일 늦게 오신 이가 특이하게 메고 오셨으나 그나마 다행이었다. 원래 잘 안 메는데 어른들 뵙는 자리라고 격식을 차리느라 메고 왔다가 금방 풀어버렸다.

     

    셋째로 수행원을 동반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정도 연력이나 지위로 봐서는 비서, 운전수 아니면 부부동반이라도 했을 법 한데 모두가 혼자서 온 것이다. 아니면 어느 이름있는 작가들처럼 제자들이 몇 명씩 따를만한 인사들이셨음에도 그랬다. 아니면 오빠부대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독신자들이 많았으나 배우자가 있는 이들도 부부가 같이 오지 않는 것을 보면 부부간은 이미 멀어진 상태였다. 도사끼 있는 이들은 부부사이가 멀어진다. 좋은 해석은 자기 몸관리, 정신관리들을 잘 해서 수행원이 필요 없는 이들이었다. 70세가 넘는 분들도 계셨으나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두 건전하시기에 염려로라도 제자나 가족들이 따라나설 필요가 없는 이들임을 느꼈다.

     

    넷째로 먹는 음식이 자유로웠다.
    승려, 신부, 교무, 목사, 천주교 성직자들이 모두 모였고 각종 교마다 금하고 있는 음식들이 있으나 아무도 테를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막걸리잔을 채우고 건배하고 안주 찾았다. 물로 모두가 술을 먹고 고기를 먹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자기들의 종교 색깔을 주장하지 않고 나처럼 운전하기에 술을 안먹는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다섯째로 대화가 거침없이 자유로웠으나 대립은 없었다.
    나는 나름대로 모인 구성원 중에서 반 이상의 사람들과는 잘 알고 관계해왔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이들도 있었으나 단번에 10년지기 50년지기 친구들처럼 거침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오히려 목사들끼리 모인 노회나 총회서는 서로 말도 조심하고 부딪치고 언성이 높아지고 회의 도중에 파행하는 일을 수없이 보았다. 그런데 이날 모임에서처럼 맘 놓고 떠들 수 있는 분위기는 어디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고 화기가 넘쳐났다.

     

    여섯째로 잘난 사람들을 못만나보았다.
    지금 이 시대 타칭 도인에 가까운 이들이 모였다. 실제로 영안이 밝은 이들이었고 철학을 전공한 이, 종교심리학과 심리주의를 공부한 이, 히말리아에서 달라이 라마를 만나신 분, 산신령 같은 도풍을 지는 이들, 동양철학에 매료외어 기공학과 기학을 공부한 동양철학 박사 등등 즉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도 하고 관상, 수상, 족상, 두상, 전상, 후상, 옆상 다 볼 줄 아는 이들이 모였다. 서울대, 미국 어느 대, 유렵 어느 대, 각 종단에서 세운 대학들을 나온 이들이었다. 그러나 공통점은 아는 체 하거나 잘난 체 하는 이들을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인사치레로라도 겸손을 부린다거나 무슨 양보 따위도 못보았다. 종교 지도자들이었으나 자기네 종교를 내세운 이들도 없었고 식사시간 전에 자기네 종교의식인 기도를 한다거나 성호를 긋는다거나 합장을 한다거나 하다 못해 감사히 먹겠다는 소리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감사하는 마음도 없이 무례하게 아니면 허겁지겁 식탁을 대하는 이들도 못보았다.


    각 종단의 대표자격인 지도자들이 모였는데도 종교인 모임 같지 않았다. 막걸리 병이 2상자가 비었는데도 말이 많아져 같은 말을 반복한다거나 몸의 자세가 흐트러진다거나 자기 종단의 장점을 내세운다거나 은사를 자랑한다거나 남의 종단을 비하하는 발언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말을 조심하면서 가식적으로 예절을 찾지도 않았다. 나 또한 속 시원하게 거침없이 농담삼아 큰소리 치기도 했다. 나는 농사꾼이라서 농담(農談)할 자격이 있어서였다.


    어떤 큰 회사에서 제조한 식품이 있었다. 그 식품은 먹게 되면 큰 병이 난다. 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기회였다. 그래서 절대로 먹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그 회사에서 나에게 문제 삼으면 큰 사건이다. 나는 여기서 책임을 회피하고 빠져나가려고 “이 식품 먹지 말라는 말 내가 절대로 안했지요?”하니 아무도 주저하지 않고 한결같이 “네”한다. 서너 분이 대답이 없어 대답 안한 이들을 지적하면서 “네”하는 답을 얻었다. 말하자면 그곳에 모인 이들 전체를 거짓말을 시킨 것이다. 귀신을 거짓말시키기도 힘든데 스님, 목사, 교무, 도사, 귀신애비(神父)까지 한꺼번에 거짓말을 시켰다.


    어떤 사찰에서 내 강의를 듣고 내가 지적한 식품으로 대처하다보니 돈이 많이 든다고 해결책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큰 소리고 조금씩 처먹으라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얼굴을 붉히거나 성내는 이들이 없었다.


    옛날에 기싸움이 아니고 기시합이 있었다.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첫 만남이었다. 사명당이 묘향산에 있는 서산대사를 찾아갔다.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강물을 거구로 흐르게 하면서 가고 있었다. 서산대사는 그러한 도술 정도는 웃어넘기고 있었다. 사명당은 서산대사가 영접하려고 방문을 열고 나올 무렵 날아가는 참새를 손에 쥐었다.

     

    “스님, 이 참새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죽었다고 하면 날려 보내고 살았다고 하면 쥐어서 죽이려는 것이었다. 이때 서산대사의 대답은 “내가 지금 나가려는 사람입니까, 들어가려는 사람입니까?” 나오려는 사람이라고 하면 다시 방으로 들어가고 들어가려는 사람이라면 나오면 되는 것이다.


    사명당은 참새를 날려주고 서산대사는 밖으로 나와 반가이 손님을 맞이했다. “설마 스님께서 살생이야 하겠습니까?” “설마 손님 맞이하려는 스님께서 들어가시기야 하겠습니까?”


    식사는 바늘을 한 줌을 국 그릇에 넣고 국수를 만들어 마셨다. 사명당이 계란 1줄을 위로 쌓아 올렸다. 서산대사는 맨 아래에 있는 계란을 빼서 공중에 띄워놓고 차례로 아래에 있는 것을 꺼내 위로부터 내려가며 쌓았다. 마지막에 저쪽 윗계란을 맨 아래에 끼워 넣었다. 무슨 시합 무슨 시합이 계속되다가 결국 사명당이 졌고 나이 어린 서산대사의 문하생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기싸움은 그런 재주부리는 이들을 못보았다. 강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는 재주 정도는 놀라지도 않을 인물들이었다. 계란이 쌓이고 말고 정도는 별 상관이 없었다. 앞에 앉은 이의 과거가 어떠했고 미래가 잘 되고 못되고 하는 재수 따위나 사업에 흥망성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다만 해야 될 일은 국가의 장래나 사회의 변화나 무엇보다도 환경의 오염 염려 같은 더 큰 문제들을 논의하는 장이었다. 각본 없는 희극을 구경하고 온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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