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욕 끊은 이를 사문(沙門)이라 하며 세속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출가(出家)라 했으며, 높은 산 험한 바위는 지혜 있는 이가 거처할 곳이요 푸른 솔 깊은 골짜기는 수행하는 이가 깃들 곳이라 했다.

겹겹이 산으로 쌓인 첩첩산중(疊疊山中). 보이는 것은 눈 덮인 산뿐이요, 들리는 것은 바람소리뿐이다.

편리만을 뒤쫓는 문명의 이기들이 자취를 감춘 충남 금산 대둔산 태고사, 그곳에 90년을 하루같이 수행해온 도천(道川)스님이 있다.

수월·묵언스님 법 올곧게 이어 “나보다 남위해 살아라” 늘 강조 대둔산을 올라가 태고사에 다다르면 제일먼저 반기는 것이 석문(石門)이다. 따로 돌을 깍아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석 두개가 나란히 서있다. 온 나라에 폭설이 내린 날 대둔산도 온통 하얀 눈밭이었다.

산길인지 나무사이인지 어두운 지혜를 가진 이에게는 분간조차 힘든 길을 쉼 없이 올라갔다. 푹푹 빠지는 발걸음을 하나 하나 옮기니 도량의 목탁소리가 들린다. 목탁소리에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자 지혜 없는 자에게 철퇴가 내려쳤다. 험한 바위가 두 손을 모은 채 어서 오라 손짓하고 있지만 길은 도통 보이지 않았다. 어디가 문(門)인가. 마음을 비우니 바위 한켠에 ‘石門’이라 쓰인 빨간 글씨가 그제서야 보였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 사람이 지나갈 수 있으니 그곳이 들어가는 길이었고 마주한 그 돌이 문(門)이었다. 태고사는 이렇게 자연의 지혜로움을 가르쳐 주는데 사람들은 사람이 만든 문만을 고집하여 찾으니 바로앞에 놓인 문조차 보이지가 않았다.

문명에 물들어 자연의 지혜를 잃어버린 어리석은 사람에게 주는 태고사의 경책(警責)이 따갑다. 도천스님은 “사찰이 관광지로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공부해야 할 도량이 구경거리로 전락되어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질책이다.

자연 그대로의 일주문은 도천스님의 그런 뜻이 담겨있다. 편하게 길을 넓히고 닦는다고 해서 공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애욕에 휩싸인 어리석은 사람에게 태고사 일주문인 석문은 보일리가 없다. 문을 지나니 태고사가 눈안에 있다.

대둔산 정상의 기암괴석을 병풍으로 어머니 품에 안긴 듯 포근한 모양이다. 석문밖 세상과는 절연(絶緣)한 듯 태고사가 대둔산에 폭쌓여 바람 한 점 찾지 않는다. 돌계단을 올라 태고사 법당에 이르니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세상은 온통 하얀데 법당앞 마당은 눈 내린 흔적조차 없이 비질 자국만 선명하다.

내리고 내리는 눈에 사람다니는 길만 내면 됐지. 마당전체가 길이라니. 그러나 그속에 자유가 있었다. 마당이 길이고 길이 마당이니 내딛는 발걸음이 자유로웠다. 일이 수행이고 수행이 일이니 그 속에 자유와 해탈이 있었다.

90년을 하루같이 살아온 도천스님은 13세에 금강산 마하연사로 출가했다. 은사스님은 수월스님의 상좌인 묵언스님이다. 묵언스님은 법명은 아닌 듯 싶다. 일체 말이 없고 묵언정진했다고 해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수월스님과 묵언스님의 법이 그대로 도천스님에게 이어졌다. 스님은 그곳에서 20년간 정진했다. 해방이 된 후 스님은 남으로 내려왔다.

남으로 내려온 스님은 태고사를 비롯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 칠불암 등 전국의 제방에서 스님들과 함께 공부를 했다. 그때 같이 공부한 스님들이 석암스님, 도광스님, 서암스님들이다.

탁발도 하면서 도를 닦겠다는 일념으로 정진했다. 스님은 “모두가 열심히 살때였다”고 회상했다. 스님은 정화시기에 다시 태고사로 갔다. 도반스님들이 전쟁으로 태고사가 폐허가 됐다며 예전의 태고사가 아니니 가지말라고 말렸다. 다른 큰 절도 있으니 그곳에서 정진하자고도 했다.

그러나 스님은 태고사로 갔다. 만류하는 도반스님들에게 ‘도량이 좋아서’라는 말만 남겼다. 전쟁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태고사에서 스님은 50년을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하루가 50년이고 50년이 하루였다.

도량은 그렇게 5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다시 생명을 얻었다. 산문안에서 청규를 홀로 실행한 스님의 수행력에 태고사는 다시 예전의 생명력을 얻은 것이다. “허송세월을 보내서야 되겠느냐”며 스님은 게으른 중생들을 채근하지만 중생은 귀가 덮혀 듣지 못하고 있다.

스님은 “자기 재물에 만족할 줄 알면 침해함이 없다. 남의 것일때에는 주지 않으면 취하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그것이 풀잎일지라도” 스님은 지족(知足)할 줄 모르기에 탐심이 생긴다고 한다.

갈등과 분쟁, 그리고 혼란은 모두가 자기것보다 남의 것에 대한 애욕때문이라고 경책한다. ‘불자들의 신심이 떨어진다’는 말에 스님은 “그렇다면 그것은 스님들 책임”이란다. 그러나 그 말에는 스님만의 책임이라는 말만은 아니었다.

어리석은 중생들 모두가 한 책임이란 말이다. ‘내탓 네탓이 따로 있겠느냐 모두가 원인이지’라며 핑계를 대지 말고 자신을 반조하라고 설했다. 스님은 요즘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보현행원품〉을 읽어보라고 하신다.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남을 위해 살라는 것이다.

당대에 무엇을 남기겠다는 욕심보다는 후세의 사람에게 필요한 일을 해보라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수행과 일 그리고 계행, 보살행이 따로 있겠는가. 대둔산 주인에게 그런것은 의미가 없나보다. 다시 눈이 내리자 스님은 마당으로 달려갔다. 비질을 하며 눈내린 마당을 쓴다. 대지가 온통 하얀데 태고사 마당만은 흙빛이다.

사진 김형주 기자

#태고사에 가니…

먹고사는 모든 생활 차별없이 똑같더라 도량이 주인을 닮았는지, 주인이 도량을 닮았는지 알 수 없지만 태고사에 가면 다른 도량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예사롭지만도 않다.

우선 대중이 함께 사용하는 세면장에 가면 촘촘히 적힌 글귀가 사람의 눈을 고정시킨다. ‘더운물을 아껴씁시다. 더운물을 찬물에 타서 찬기만 가시면 사용하여 전기를 절약합시다’ 찬기만 가실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일부러 따뜻하게 해서 씻지 말 것을 당부한다. 그것이 절약이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것은 절약만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문명의 이기에 너무 빠져들지 말라는 것이다. 편안함 때문에 지혜를 잃을 수도 있다는 가르침이다. 그 밑의 글귀는 한술 더 뜬다. ‘찬물 사용시는 가급적 밖의 샘물에서 사용하여 사중의 돈인 전기료를 절약합시다’ 한겨울에 건물밖에서 샘물을 퍼서 쓰라고 일른다.

얼마나 전기료가 든다고 이런 글까지 써놓았을까. 그러나 그 이유가 분명하다. 사중의 돈이기에 아껴야 한다는 것이다. 삼보정재는 한 푼 한 푼이 부처님 돈이다. 적고 많음이 문제가 아니라 정재라고 생각하라는 가르침이다. 시주의 은혜가 깊음을 알라는 뜻이기도 하다.

또 하나, 태고사에는 화장실이 딱 한곳 뿐이다. 요사채에서 조금 떨어진 도량입구쪽에 위치해 있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밤 결코 가기 쉽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특별히 큰스님을 위해 화장실을 따로 만들지 않았다. 큰스님을 비롯 어느 누구라도 이 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

구순(九旬)의 노스님도 다른 대중과 똑같이 이 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 모두가 평등한 것이다. 또하나, 태고사 사람들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 이외에는 하루종일 두가지중 하나만 해야 한다. 일을 하던지, 정진하던지, 다른 것은 없다. 그리고 모두가 그래야 한다.

도천스님이 50년을 그렇게 태고사에서 살았으며 90년을 그렇게 몸에 익혔다. 30년을 넘게 도천스님과 함께 태고사에서 정진해 온 상좌 정안스님도 똑같다.

그리고 또하나, 태고사는 태고사를 찾는 이들을 모두 반긴다. 기도하고 정진하고 운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며칠이든 태고사에 머물수 있다. 요사도 넉넉하고 법당도 넉넉하다.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