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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들의 정당
    宗敎 단상 2011. 9. 29. 07:53

    예수가 언젠가 하느님 나라를 포도원에, 그리고 하느님을 포도원 주인에 비유하여 설교한 적이 있다.(마태복음 20,1-16) 요지는 이렇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구하려고 이른 아침 장터에 나갔다.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로마은화)으로 정하고 몇 일꾼들을 구해 포도원으로 보냈다.

    아홉 시쯤 다시 나가서 할 일 없이 있는 사람들도 한 데나리온씩 주기로 하고 포도원으로 보냈고,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그렇게 했다.

    다섯 시쯤에도 일감을 찾고 있던 이들을 불러 포도원으로 보냈다. 날이 저물자 주인은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한 데나리온씩 주기 시작했다. 일찍 와서 더 많이 일했으니 더 받으리라 기대하던 일꾼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씩 주었다.

    이들은 불공평하다며 따졌지만, 본래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기로 했다며, 주인은 불평하는 일꾼들을 나무랐다.’ 예수의 이 설교는 하느님이 악인이나 선인이나 해를 비추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이 가칭 ‘기독자유민주당’을 창당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번에는 국회의원을 만들어보겠노라며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물론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목사들의 창당 행위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 국가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목사는 물론 스님도 원칙적으로 국회의원이 될 수 있고 대통령도 될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소외된 이웃과는 상관없는

    ‘당신만의 정당’을 만들려는

    이런 시도가 ‘기독’ ‘자유’ ‘민주’의

    이름으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만 먹먹하게 막혀왔다

    그런데 창당취지문을 보면서 아연실색했다. 먼저 ‘기독’, ‘자유’, ‘민주’를 당명으로 한다면서 그에 관한 철학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자리에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존중하고, ‘친북좌경세력을 척결’하며, 이른바 보편복지를 ‘배격’하고, (이슬람)수쿠크법과 (불교)자연공원법을 ‘저지’하고 ‘반대’한다는 등 내내 배타적이고 과격한 언어들로 가득했다.

    도입부 부터 “기독교가 인류역사 4천년동안 세계 역사의 주역이었다”는, 무슨 뜻인지 종잡을 수 없을 문장을 구사하더니, 일부 문장에서는 ‘할당제’가 아닌 ‘활당제’라는 엉터리 철자법도 발견되었다. 졸속으로 만들어진 취지문임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씁쓸한 것은 전체가 ‘기독’의 정신과는 반대로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기독교인은 예수의 정신을 구체화시키는 이들이다. 예수가 어떤 분이던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심지어 원수마저 사랑하라고 가르친 분 아니던가. 하느님이 자비로우시니 너희도 자비로워야 한다고 가르치다가 희생된 분 아니던가.

    예수가 언제 정치를 하고 권력을 추구했던가. 예수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추종했다는 말인가. 도리어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열두 시간 일한 이나 한 시간 일한 이나 한 데나리온씩 주는 이가 하느님이시라고 가르친 분 아닌가. 일감을 찾지 못해 열한 시간을 애타게 기다리던 이의 안타까운 마음마저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 분 아닌가. 그런데 시장경제를 존중하겠다니, 시장논리에서 소외되어 고통받는 이들은 어쩌란 말인가.

    더 주지 못해서 안타까워해야 할 목사의 신분으로 어찌 일률적 무료 분배를 ‘배격’한다는 냉혹한 말을 내세울 수 있다는 말인가. 어찌 이슬람, 불교 등 이웃을 헤아릴 줄 모르는 언사를 함부로 구사한다는 말인가.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서처럼, 소외된 이웃과는 상관없는 ‘당신만의 정당’을 만들려는 이런 시도가 ‘기독’ ‘자유’ ‘민주’의 이름으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만 먹먹하게 막혀왔다.

    [불교신문 2754호/ 9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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