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법문을 들을 때나 교리에 대한 서적을 보면 ‘견문각지(見聞覺知)’라는 단어를 많이 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대체로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이라고 풀이하면서도 전체적인 내용에 상반되는 경우가 많아서 혼란스럽습니다. 어떤 경우는 “보고 듣는(見聞) 놈이 누구인지 깨달아 알아야(覺知) 한다”고 풀이하여 수행의 전 과정처럼 설명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고 하는 식입니다. 정확한 뜻이 어떻게 되는지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능력’ 말함
탁월 하나 끌려가면 고통 따라와
답 : ‘견문각지’라는 용어에서 ‘각지(覺知)’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몰라서 일반 사전식 해석을 함으로써 생긴 문제입니다. 이때의 각지(覺知)는 ‘깨달아 안다’는 뜻이 아니라, ‘느끼고 안다’로 풀이해야 합니다.
견문각지라는 용어는 불교의 인식론(유식론)에서 나온 것으로 인식기능인 ‘여섯 가지 인식(六識)’의 작용을 네 가지로 정리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눈(眼) 귀(耳) 코(鼻) 혀(舌) 피부(身) 마음(意)의 여섯 가지 인식기관이 있고, 이 기관들은 각각 고유의 인식기능이 있습니다. 그 기능의 작용을 보면, 눈은 보고(見) 귀는 듣고(聞) 코는 냄새를 맡으며(聞) 혀는 맛을 느끼고(覺) 피부(온 몸)는 촉감 등을 느끼고(覺), 마음은 앞의 다섯 가지를 통합하거나 고유의 기억작용 등과 연계해서 판단하고 아는(知) 것입니다. 다시 말해 견문각지(見聞覺知)는 우리가 지닌 탁월한 능력을 요약한 것이며, 그 작용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위의 뜻에 따라 질문에서 제기했던 문장을 다시 정리하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두 문장에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분명 탁월한 능력이기는 하지만 오직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집착하게 되면 그때부터 자신이 자신을 속이는 묘한 상황이 전개됩니다. 흔히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 비해 우월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이 탁월한 인식능력을 왜 불교에서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식능력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주인 노릇하게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보고 듣고 느끼고 기억하며 분별해서 아는 그것이 가장 확실하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게 되면 다른 사람과 충돌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곧바로 갈등과 싸움으로 이어져 큰 불행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졌던 엄청난 전쟁도 그 시작은 단순한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의 달을 보면서도 슬픈 생각을 하기도 하고 기쁘게 보기도 하며 고민에 빠지기도 하며 편안하기도 한 것이지요. 똑 같은 사람을 두고 어떤 이는 그를 나쁘다고 하고 다른 이는 착하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낱낱의 생각들이 절대적으로 영원히 옳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무 생각도 없이 살라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일어난 그 생각에 절대적 가치를 두지 말고 치우침이 없는 중도적 지혜로 밝게 보라는 것입니다. 중도적 지혜를 발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생각이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번갯불 같은 것임을 밝게 봐야 합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 끌려가기 시작하면 그림자처럼 고통이 따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그 자리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