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 雷
계시. 천벌. 징벌. 경고. 풍작. 무상(無常). 신력
벽력장군 내려 보내라. 벽력사자 내려 보내라. 우레장군 내려 보내라. 우레사자 내려 보내라. 화덕장군 내려 보내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번개는 행실이 바르지 못한 악인에게
하늘이 내리는 천벌을 상징해왔다. 못된 짓을 일삼는 수명장자를 하늘의 주인 천지왕은 번개를 내려보내 혼내주었고, 문무왕 2년에는 어미를 때린 자식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벽력장군이 내려온 것이다. 예로부터 벼락에 맞아 죽은 사람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심지어 번개가 치는 날엔 남녀간의 잠자리도 피했다. 하늘의 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잠자리를 같이 하면 하늘이 노해 몸이 붙거나 간질이 걸린 아이를 낳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눈깜짝할 새에 땅으로 내려꽂히는 번개의 모습은 이 땅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원초적인 두려움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번개문(雷紋)은 인류가 창안해낸 가장 오래된 문양 중 하나로 꼽히는데 우리 역사에서도 신석기 시대의 토기와 청동기 시대의 청동거울 등에 이미 번개문이 나타나고 있다. 그 종류는 크게 지(之)자형과 회(回)자형이 있는데, 후자를 가리켜 따로 회문(回紋)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문양의 태생이 그러한지라 번개 문양은 주로 하늘의 뜻을 묻고, 하늘의 보살핌을 바랄 때 쓰이는 제기(祭器)에 많이 사용되었다. 특히 불교문화가 융성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각종 향로와 범종 등에서 번개 문양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편으로 회(回)자로 표현된 번개 문양은 그 모양새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無始無終)’하여 우주의 근원이나 장수를 상징하기도 하였다. 오래 사는 것 또한 하늘의 뜻이고 보면 모두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얼마 전만 해도 ‘천벌 받을라’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건물마다 피뢰침이 가득한 오늘날, 더이상 번개는 악인을 벌주지 못한다. 오히려 장마철 애꿎은 행인들만 노심초사할 뿐이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에 하늘도 이제 그만 지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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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돌림무늬(壽字曲頭紋)
회자세살무늬(回字細 紋)
돌림팔모무늬(曲頭八角紋)
목제자문 |
번개(雷)
번개와 관련된 다른 민간신앙으로 머리카락을 태워 벼락을 물리치는 풍습을 들 수 있다. 이때 머리카락은 사람의 인격을 상징하며 앞으로는 착하게 살겠다는 다짐을 하늘에 표시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번개는 워낙 빨라 벼락을 내리는 장본인인 벼락신조차 컨트롤이 힘들다. 이에 따라 등장하는 것이 바로 번개의 여신 ‘전모’이다. 번개의 여신은 벼락신이 날려 보낸 번개가 그 목표물에 정확히 맞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번개의 위력이 약해진 데에는 강감찬 장군의 공이 크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하늘이 진노하여 내리는 번개칼을 강감찬 장군이 잡아 부러뜨렸는데 그 이후에는 약한 번개만 내려온다는 것이다.
부귀 凸
남성. 생식. 수호. 부활. 번창. 풍요. 행운. 동쪽. 중심. 맹세(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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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음경( 陰莖 )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나 돼 배필을 얻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자를 삼도에 보내 배필을 구했다. 사자가 우염부 동로수 밑에 이르니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덩어리의 양쪽 끝을 물고 싸우고 있다. 사자는 그 마을 사람을 찾아보고 누가 눈 똥인가를 물었다. 한 소녀가 말하였다. “이것은 우염부 상공의 딸이 여기서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 숨어서 눈 것입니다”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그 여자는 키가 칠척오촌이나 된다. 이 사실을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수레를 보내어 그 여자를 웅궁으로 맞아 황후를 봉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하례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지철노왕] 중에서
민망하기 그지 없는 이 이야기는,
사실 사람됨의 크기를 성기의 크고 작음으로 나타낸
많은 옛 이야기 중의 하나일 뿐이다.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은 이보다 한 술 더 떠서, 자신의 백성들이 낙동강을 왕래하는 것을 불편해 하자 자신의 남근을 양쪽 강 언덕에 걸쳐 놓아 다리로 삼았다고 한다. 허풍도 이 정도면 아무나 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식 꿈 해석에 따르면, 툭 튀어나온 모든 것은 남성의 성기이다. 옛 사람들의 상상력도 이와 크게 다르진 않아 무엇이든 튀어나온 것은 남근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지금까지도 그 흔적은 남아 있어 전국적으로 약 120여 개의 남근 신앙 유적이 남아 있다. 이중에는 선사시대의 암각화나 신라시대 토우에서처럼 남근을 드러낸 인물상들도 있지만, 보통은 신체의 다른 부위는 생략하고 성기 부분만 과장되게 표현한 남근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성기의 쓰임이 그러한지라, 이러한 상징물들은 대개 풍요와 득남을 기원하고 있었다.
특히 철(凸)자의 모양으로 문양화된 남근은 부귀를 뜻하기도 하였는데, 이 문양을 중첩시켜 이은 것은 부귀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을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한편, 나무를 실제 남근 크기로 다듬어 여신에게 바치는 민간 신앙도 있었다. 아직도 많은 해안지방에서 행해지고 있는 이 풍습은 처녀로 죽은 여신에게 남근을 바쳐 혼령을 위로하고, 아울러 여신의 생산력으로 풍년과 풍어를 기원코자 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판소리 [변강쇠전]에서는 변강쇠의 남근을 가리켜 “이상히도 생겼네, 맹랑히도 생겼네” 라며 희롱하고 있다. 이 이상하고 맹랑한 것을 마을 입구에 세워놓고 풍요, 부귀를 기원한 것이 옛사람들의 넉넉함이었다.
또한 음난을 막으면서 동시에 남녀의 순조로운 결합을 돕는 이중의 슬기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풍요로움이 사라진 지금, 남근은 그저 크기만을 바라는 쓸쓸한 것이 되었다. 김수로왕의 남근 다리와 양영순의 「누들누드」에 나오는 남근 다리가 같지는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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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귀문(富貴)
아자살(亞子) 부귀문
금동제투각식이. (金銅製透刻飾履). 삼국시대.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
부귀(凸)
한 자는 30.303cm, 한 치는 그 1/10인 3.0303cm이다. 이에 따라 계산해보면 한 자 다섯 치는 45.4545cm가 되는데 확실히 배필을 얻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길이이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지고 다리를 건너다 중간에서 쉬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담배를 피다가 무심코 왕의 남근에 담뱃재를 털었는데 이로 인해 왕의 남근에는 검은 점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도 김해 김씨 남자들의 남근에는 그때의 검은 점이 남아있어 위대한 왕의 고귀한 혈통을 상징한다고 전해진다.
남근신앙의 잔재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곳으로 해당신 전설이 서려있는 강원도 신남리를 들 수 있다. 특히 신남해수욕장 언덕 ‘남근석 조각공원’에는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된 남근석들이 전시되어 뭇사람들을 민망하게 한다.
고대 유대인들은 신에 대한 맹세를 할 때 남근에 손을 대고 하였다. 또한 이집트의 신 오시리스(Osiris)는 자신의 남근을 쥐고 서 있는데, 이집트 인들은 이런 제스처를 풍년을 약속하는 증표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