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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구산 용문사
    ♠寺刹巡禮 2012. 3. 18. 06:04

    용문사는 조계종 제13교구 본산인 쌍계사 말사로 호구산군립공원에 자리잡고 있다. 원효대사는 금산에 보광사를 짓고 산 이름도 '광산' 이라 불렀으며, 호구산에는 첨성각을 세웠다. 그 뒤(1661년)에 학진 스님이 보광사를 호구산으로 옮겨 지었다. 보광사는 용문사의 전신인 셈이다. 조선조 현종 때 백원당 대사가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용소 마을 위에 터를 잡아서 없어진 절을 다시 세우고 이름을 용문사라 한 것이다.

    임지왜란 때 이 절 스님들이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뜻을 받들어 왜군과 싸웠기 때문에 호국사찰로도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조선조 숙종은 '수국사'라는 패와 연옥 촛대 번 등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연옥 촛대 등은 빼앗아가고 지금은 금패와 궁중매듭인 번(幡-표기)만 남아 있다 한다. 이렇듯 용문사는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된 절로 많은 고승을 배출한 남해 최대의 사찰이다. 현재의 절은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재건한 것이다.

    숙종34년(1708)에는 염불암을 중창했다. 관음, 백운 두 암자는 고을사람들의 발원으로 축조했다는데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뒤에 백련암(白蓮唵)을 절의 서쪽에 신축하였다.

    용문사 일주문도 일직선 기둥 위에 지붕을 얹었다.

    용문사 일주문을 통과하면 '세속의 번뇌를 씻고 불국토로 들어가라'고 속삭이듯 맑은 계곡 물이 흐르고 있다.

    용문사 천왕문에서 눈여겨 볼 것은 사천왕 발밑이다.

    다른 절 사천왕이 마귀를 밟고 있는데, 용문사 사천왕 발에 밟혀 신음하는 것은 관리, 양반이다. 권력을 탐하거나 아부하지 않고 민초들 곁에 있고자 했던 용문사의 정신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천왕들이 관리부시로 인해 훼손되어가고 있음이 매우 안타까웠다.

     

    경내 문화유적으로는 대웅전(경남 유형문화재 제 85호)과 석불좌상(경남 유형문화재 제 138호), 명부전(경남 문화재자료 제 151호) 등이 있다. 대웅전을 제외한 탐진당, 적묵당을 비롯한 절집은 가파른 비탈에 세우느라 처마들이 서로 닿지 않도록 한쪽은 팔작식 지붕, 다른 쪽은 겹처마 맛배지붕으로 지었다. 처마 밑 공포는 화려한 다포식과 단아한 주심포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수많은 용조각이 새겨진 대웅전, 용화전에 모셔진 화강암으로 된 고려시대의 용문사석불, 조선 인조때의 시인 촌은 유희경선생의 촌은집책판 52권을 비롯하여 문화재자료 천왕각, 명부전이 있다.
    또한 문화재로는 지정되지 않았지만 임진왜란때 승병들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총구가 세 개인 삼혈포와 용문사가 호국사찰임을 표시하기 위해 숙종이 하사한 수국사금패, 궁중매듭 번 등이 용문사가 자랑하는 문화재이다.용문사의 산내 암자로 백련암과 염불암이 있다.
    특히 백련암은 수행처로 이름나,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용성스님,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석우스님, 성철스님이 머문 곳으로 유명하다.

    대웅전내 용문사괘불탱 보물 제 1446호

    본존불상 좌·우에 협시보살상만을 배치시켜 삼존도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다. 중앙의 본존불상을 위시하여 좌측(向右)에는 정면을 향한 채 똑바로 서서 여의(如意)를 들고 있는 보살상이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쪽(向左)에는 좌협시보살상과 동일한 자세로 서서 연꽃가지를 받쳐 든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다.

    중앙의 본존불상은 어깨가 훤히 드러난 오른손을 길게 내려뜨리고 왼손을 가슴 앞까지 들어올린 채 두 발을 좌·우로 벌려 연화좌를 딛고 서 있는 입불상으로, 둥글넓적해진 형태에 눈·코·입이 작게 묘사되고 미소가 잘 보이지 않는 경직된 표정의 얼굴은 수평으로 들어올려 각이 진 어깨와 더불어 18세기 후반 이후 불화들에서 주로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식 특징이다.

    좌협시보살상은 보관을 쓰고서 여의를 들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석가모니불의 좌협시인 문수보살상이라 추정된다. 머리 크기에 비하여 어깨가 좁아지고 작아진 발로 인하여 위축된 느낌이 들긴 하지만, 팔에 걸쳐 흘러내린 길고 굵은 천의자락으로 인하여 전체적으로는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우협시보살상 또한 좌협시보살상과 표현이 유사하다. 그림 하단부에는 화기가 남아 있다.

    이 괘불탱은 인물의 형태 및 표정, 신체 비례 등에 있어 18세기 중반 이후 불화의 전형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직된 듯 조화롭고 세련된 표현기법을 보여주어 18세기 중반 이후 불화 연구의 자료적 가치가 크다.

    삼존불은 대웅전 중앙에 위치한 장방형 불단 위에 각각의 연화좌를 두고 그 위에 봉안되어 있다. 머리 뒤편 정수리 쪽으로 서너 개의 나발이 결손 되었거나 소매와 군의자락에 도금이 탈락한 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인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세 구의 불상은 저부에 마련된 복장공이 모두 열려 있었고, 복장물 역시 대부분이 도난당한 상태였으며, 그중 경전 · 다라니 등이 불상 내부의 목 부분과 팔, 다리 쪽으로 끼워져 남아 있었다. 또한 양측 협시상은 저부의 복장공 외에 배면 중앙에 타원형의 복장공을 따로 만들어 다른 판재로 엉성하게 덧대어 마감되어 있었다. 배면에 마련된 별도의 복장공은 팔의 내부나 머리와 같이 좌상의 밑바닥에서 복장물을 채우기 어려운 것을 쉽게 처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밖에 배치는 용이 갈기를 세우고 있는 모습 또한 특이하다 또다른 재미를 느낄수 있는 용문사만의 특색이라 볼 수 있다.

    보통사찰에는 사면귀에나 현판 좌우에 용을 배치하는 형태를 이루고 있으나 이곳은 대웅전 전면에 용과 봉황을 익공부분위에 배치한점이 특이하다.

     

    괘불걸이(사찰에서 행사를 할때 당간지주에 세워서 괘불탱화를 걸고 야단법석을 하는 기구)

     

     

     

     

     

     

     

    약 300년 전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용문사 경내에서 발견된 보살상이다. 현재는 하얀 분칠을 한 상태여서 본래의 모습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원만하나 눈과 입이 작고 코가 큼직하여 다소 형식화된 면이 보인다. 긴 상체에 넓은 무릎 등은 부피감이 풍부하고 탄력적이어서 보살상의 격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흘러내리고 있는데, 띠주름 무늬가 자연스러워 불상의 특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왼손은 배에 대고 병을 들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대었는데 연꽃가지를 잡고 있었던 것 같다.

    통일신라 후기의 원만한 특징이 표현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 내지는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뒷편에 차밭

     

     

     

     

    다른사찰에서는 금으로 입힌 불상들이 많은편인데 용문사의 경우 하얀 분칠을 한 불상을 볼 수 있어 색다른 멋을 느낄수 있다.

     

     

     

     

     

     

     

     

    구유(한번에 1000명의 식사를 제공할 규모라 하니 이 사찰의 규모도 어림 해 보시길)

    더불어 승병들을 길러 냈던 사찰이라고 하니 승병의 함성이 들리는 듯 했다.

     

     

     

     

     

    엿사를 말해주는 이름 모를 선사님들의 부도군

    연꽃이 받치고있는 종탑형식의 부도탑이 아름답기도 하고 세월의 흔적을 보여 주었으면 특이한 형식이였다. 문화재적인 보존가치가 많은 석조물이라 볼수 있다.

    이슬 머금은 매화꽃과 더불어 남해 보리암을 찾아갔다가 안개 때문에 시야가 가려 사찰순례를 망치는듯 했으나 산문을 나와 여수로 향하는 중에 용문사 표지판이 확 눈에 띄어 용문사를 찾았는데 후회는 없었다.

    역사의 흔적이 남아 숨쉬는듯 했으며 녹차향과 더불어 고목들과 어울러 배치된 사찰의 전경은 정겹기 까지 하고 호구산 정산에 걸려 있는 안개 또한 옛선사님과 승병들의 모습인양 용문사를 내려 보고 있는 형상 이였다.

    계곡의 물량이 많은듯 싶고 유속이 빠른듯하여 천왕각과 다리들이 비피해를 본듯해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며 물줄기를 잡아햐 사찰에 피해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입구 좌측편에 성황당처럼 작은 전각이 있어 들여 보았더니 지하여장군이 썩어서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보존되어 있었으며 천왕각의 사천왕상의 훼손이 더 심해지기전에 보존관리에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듯하디.

    요즘같이 어수선한 시기에 용문사 사천왕상 발아래 탐관오리를 생각하면 더더욱 관리와 보존에 관심을 두었으면 하고 남해군과 용문사에 부탁드려본다.

     

    매화향과 녹차향을 머금고 용문사의 선사님들의 기를 받아 산문을 나섰다.

    남해하면 보리암만 생각하는데 호구산 용문사를 순례하시면 후회는 없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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