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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이 개인의 욕구를 모두 들여주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
    宗敎 단상 2011. 11. 15. 06:45

     

     

     

    수능 앞두고 자식을 위해 기도한다면 답 없어, 신앙간증 들으보면 불편 넘어 괴롭고 욕 나와

     

    한국 종교계가 극복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본질적인 문제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기복신앙 즉 현세구복적 신앙을 꼽을 것이다. 


    기복신앙이 아니라면 교회나 사찰들이 당장 공동화될지 모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치병, 장수, 사업의 성공이나 번창, 입학이나 취직 등 이런저런 세상의 복을 구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 복을 구하는 마음이야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문제는 무엇이 복이냐 하는 것이다. 


    만약 종교가 구하고 약속하는 복이 위에 열거한 것 같은 물질적인 것이라면 종교는 존재이유를 상실할 것이다. 신앙인들이 구하는 가치가 일반인들이 구하는 가치와 똑 같다면, 대한민국 사람들 모두가 신앙인이 된다 해도 우리사회는 하나도 달라질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세속적 욕망을 더 부추기고 확대재생산

    사실 기복신앙을 위주로 하는 종교는 존재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존재해서도 안 된다. 초자연적 힘을 빌려 자연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것이 신앙이라면, 그런 신앙은 노골적으로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만도 못할 것이다. 


    비신앙인들은 적어도 초자연적 무기까지 동원해서 자기 욕망을 채우려 하지는 않기에 신앙인들보다 더 솔직하고 덜 이기적이다. 하물며 종교에 투자되는 엄청난 물적, 심적 에너지를 감안할 때 종교무용론을 주창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무욕과 무소유를 가르치는 부처님의 말씀, 마음이 가난하고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기복신앙이 얼마나 종교의 본질과 어긋나는 것인지 알 법도 한데,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나라 신자들이나 종교인들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 것 같다. 자발적 가난이나 온유와 겸손보다는 신앙의 이름으로 세속적 욕망을 더 부추기고 확대재생산하는 것이 오늘 우리 한국 종교계의 일반적 모습이다. 


    복을 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본성이다. 아무도 그 자체를 탓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은 누구에게나 인생의 목표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는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 한다. 자기를 희생하면서 사랑을 베푸는 사람도 힘은 들지만 남이 모르는 기쁨과 행복이 있기 때문이며, 손해 보는 줄 뻔히 알면서도 자기가 한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도 그것이 주는 더 큰 만족감이 있기 때문이다. 


    가난을 자취하면서 안빈낙도 하는 사람들,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감내하면서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도 어떤 더 고차적 행복이나 만족감 같은 것이 없다면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행위를 순수하지 못하다고 비판할 수 있겠는가? 행복을 원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며 본성이라면 그런 비판은 지나치게 가혹하고 인간으로서 거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다만 행복의 원인과 내용이 다를 뿐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고 살기는 매한가지다. 

     

    내세 위한 투자처럼 선행한다고 해도 나쁠 건 없다

     

    종교들은 미래의 보상을 약속하면서 선한 삶을 촉구한다. 나는 미래의 보상을 믿고 행하는 선행마저도 기복신앙의 범주에 넣을 생각은 없다. 물론 내세의 보상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하는 선행이 더 순수하고 위대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설령 누가 내세를 위한 ‘투자’처럼 선행을 한다 해도 나는 그 선행의 빛이 바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여전히 그를 존경할 것이다.


    내가 문제로 삼는 기복신앙은 내세보다는 지금 당장 여기서 초자연적 힘을 통해 복을 얻고자 하는 문자 그대로 현세구복적 신앙이다. 예수님도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불자들의 업보에 대한 믿음이 내세의 행복을 겨냥한다 하여 그들의 보시나 적선을 이기적이라고 매도한다면 이는 지나친 순수주의이다. 필시 그런 비판을 하는 사람은 말로만 순수 윤리를 외치지 한 번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위해 자기 손에 들어온 물질을 아낌없이 쾌척해보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


    모든 사람이 행복을 목적으로 삶을 영위한다는 사실을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선이며 선은 곧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선’이란 아주 일반적으로 ‘좋음’ 내지 좋은 것(good)을 뜻한다. 누구나 좋은 것을 좋아하듯이 행복을 좋아한다. 우리가 누구를 설득할 때 가볍게 던지는 말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말도 이런 뜻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좋은 것을 좋아하고 추구하는 것은 더 이상의 정당화가 필요 없는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일 것이다. 


    누구나 좋은 것을 원하고 추구하듯이 행복을 원하며 추구한다. 좋지 않은 것을 원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어긋나며 거의 논리적 모순에 가깝다. 사실 강한 충동이나 유혹을 못 이겨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도 적어도 그 순간만은 살인이 자기에게 ‘좋다’고 생각해서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은 이러한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악행은 악을 선으로 오인하는 데서 비롯되며, 무엇이 선인지를 제대로 안다면 누구나 선을 선택하고 행하게 될 것이라는 이론이다.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르는 습관화된 범죄나 타인의 강압, 혹은 자기도 어쩔 수 없는 충동에 의한 의도하지 않은 악행이라면 몰라도 - 요즈음 자주 들리는 아동 성추행 같은 것이 비정상적인 성호르몬 분비에 의한 것이라면 아마도 이런 범주에 포함시켜야 하겠지만 - 소크라테스의 지행합일설은 일반적으로 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심지어 악행을 즐기는 사람도 그 즐김이 좋다고, 행복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할 것이다. 

     

    욕망을 줄이는 데서 얻는 행복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지속적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며 우리가 추구할 최고의 가치, 최고의 사랑의 대상인가 하는 것이 문제다. 종교들은 각기 다양한 이름으로 이 지고선을 제시하고 있지만, 한 가지 공통되는 사실은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와의 관계 - 그것과 사랑의 연합이든 완전한 합일이든 - 를 최고의 선이며 행복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해탈이라 부르든 구원이라 부르든, 깨달음이라 부르든 은총이라 부르든, 인간의 최고 행복과 인생의 궁극적 완성이 거기에 있다고 가르치면 결코 덧없는 물질적 욕망의 충족이나 유한한 피조물에서 오는 행복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종교적 가르침을 떠나 우리는 행복의 문제를 보다 일반적으로 논할 수도 있다. 가령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 행복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이고 배타적 행복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행복, 모두가 추구해도 좋고 그럴수록 더 커지는 행복이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물질적 행복과 정신적 행복, 세속적 행복과 영적 행복을 구별하고 차별화하는 것은 주로 이 때문이다. 


    물질 자체가 악이라거나 물질보다 정신이 우위를 점하고 몸보다 영혼이 더 고차적이라고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물질적 행복은 거짓 행복이고 정신적 행복만이 참된 행복이라고 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또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이 분리될 수 있는 이원적 실체라거나 둘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에 하는 말도 아니다. 단지 정신적 행복, 영적 평화, 덕스러운 삶에서 오는 마음의 행복 같은 것이 물질의 소유나 신체적 조건에 따라 변하는 행복보다 더 항구적이고 기쁨을 주는 행복이라는 평범한 사실 때문이다. 


    욕망을 한 없이 확대하는 데서 오는 행복보다는 욕망을 줄이는 데서 얻는 행복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지속적이고 깊은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굳이 종교를 들먹일 필요가 없고 대단한 수도생활이나 고행을 할 필요도 없다. 약간의 지혜만 있으면 누구나 알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일이다. 기복신앙은 종교가 제시하는 본래적 가치, 근본적 가치를 무시하고 목적적 가치와 수단적 가치를 혼동하면서 가치의 질서를 거스른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고 선 그 자체이며 지고선(summum bonum)이다. 하느님만이 행복의 궁극적 원천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욕망과 사랑의 최고 대상이다. 

     

    무신론자는 없다, 하느님 아닌 것을 하느님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만 있을 뿐

     

    사람들은 알든 모르든 모두가 자기 존재의 근거/근원이며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을 원하며 찾고 있다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은 말한다. 다만 사람들이 흔히 피조물을 하느님으로 착각하고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이 유한한 것을 무한한 것으로 여기고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삼고 추구하는 우상숭배이다. 하지만 악한 사람은 없고 악을 선으로 오해하는 사람만 있듯이, 세상에 무신론자는 없고 하느님 아닌 것을 하느님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하느님이 창조한 피조물은 모두 선 자체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비록 차등적이지만 하느님의 선을 공유하며 좋은(선한) 것들이다. 피조물 가운데 그 자체로 나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성서의 증언이다. 피조물들은 따라서 모두 우리가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대상이다. 문제는 우리가 사랑의 질서를 어기고 하느님보다 인간을, 인간보다 동물을, 동물보다 식물을, 식물보다 광물이나 무기물들을 더 사랑한다는 데 있다. 목적적 가치를 수단적 가치, 근원적 가치를 파생적 가치, 절대적 선을 상대적 선과 혼동하고 하느님 사랑을 피조물에 대한 사랑으로 대체해서 행복을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복신앙의 문제점은 물질에 대한 욕망 자체가 아니라 지고선인 하느님을 물질에 대한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 있다. 목적은 안중에 없고 피조물에 대한 욕망만이 영혼을 지배한다. 


    중세 도미니코 수도사이며 신학자인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수단화된 하느님을 ‘양초 하느님’, ‘젖소 하느님’이라고 꼬집었다. 어두운 곳에서 물건을 찾고 나면 더 이상 필요 없는 양초처럼, 혹은 우유를 짜고 나면 안중에 없는 젖소처럼 하느님을 취급하는 태도를 풍자하는 말이다. 그런 신앙을 염두에 두고 그는 말하기를 마음이 철저하게 가난한 사람은 아예 기도할 필요조차 없다고 했다.

     

    ‘만일 내가 천국의 복락을 위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나를 지옥에 보내소서’

     

    기도란 대개 없는 것을 있게 해달라거나 있는 것을 없게 해달라는 간청인데,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마음을 비운 무욕의 사람이 그런 기도를 할 필요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기도의 일반적 형태인 청원기도를 두고 하는 것이지 침묵의 기도나 관상기도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런가 하면 이슬람의 한 수피(Sufi) 영성가는 내가 만일 천국의 복락을 위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나를 지옥에 보내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모두 순수한 하느님 사랑을 강조하는 말들이다. 


    힌두교에서 추구하는 해탈 역시 ‘더 이상 좋은 것이 없는 것’(nihsreyas)이며, 불교에서도 해탈과 열반은 지고선이다. 탐진치 삼독의 대상인 유위법(有爲法)들은 모두 무상한 것이고 고통과 슬픔의 원천이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덧없는 것들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무욕과 무소유에서 온다. 세간적 욕망과 집착이 아니라 출세간적 청정심과 자유에서 오는 것이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좋아하는 도가(道家)들도 욕심을 “덜고 또 더는” 무욕을 강조하며, 유교에서도 사욕에 의해 탁하게 된 인심(人心)을 극복하고 인간의 순수한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서의 도심(道心)을 따를 것을 강조한다. 


    기복신앙은 기적신앙과 직결된다. 자신의 노력으로 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 힘을 빌려 특별한 복을 얻으려는 것이 기적을 바라는 신앙이다.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구하는 것이 기적이다. 


    기적신앙은 어쩔 수 없는 일을 천명으로 알고 순명하는 지혜보다는 자연의 질서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려고 하는 신앙이다. 피조물 모두의 선을 위해 하느님이 제정한 자연의 질서를 자신의 선을 위해 하느님 스스로 빗겨가거나 수정하기를 바란다. 


    물론 기적이 반드시 자연의 법칙을 어기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 인간도 자연의 법칙을 이용해서 일을 하는데, 자연의 입법자인 하느님이 그렇게 못하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기적 신앙의 더 큰 문제점은 하느님의 일반적 섭리보다는 한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위해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를 비는 편파적 이기심에 있다. 


    전체의 선보다는 부분의 선을 구하는 것이 기적에 매달리는 신앙이다. 부분은 언제나 전체의 일부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부분이 바뀌면 전체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게 마련이며, 부분에 영향을 미치려면 때로는 전체를 수정해야 하기도 한다. 

     

    하느님의 뜻 구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뜻 앞세워

     

    설령 하느님이 기적을 행하기 위해 제한된 국소적 개입만 한다 해도, 그 결과와 파장은 전체에 미치게 되는 것이 자연이라는 시스템이다. 무수한 부분의 악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나마 세계 전체의 조화로움과 아름다움을 보면서 이 세계를 사랑하고 인생을 긍정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의 악은 조용한 마음으로 수용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의 태도가 아닐까? 


    기적신앙은 하느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뜻을 앞세우기 쉽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의 뜻에 비추어 자기 뜻을 성찰하고 굽히지 자기 뜻을 하느님의 뜻으로 여기고 고집하지 않는다. 고난의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할 수만 있으면 피하게 해달라고 간청하면서도 결국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자기 뜻을 내려놓은 예수님의 기도는 기도의 전형이다. 


    그는 또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가르쳤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전에 이 땅에 천국이 임해서 하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먼저 구하는 기도를 가르쳐주셨다.

    기적은 주로 한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만이 경험하는 사건이다. 기적은 모든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라 차별적이고 배타적인 경험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날이 마침 수능시험이 있는 날이다. 배타적 경쟁을 본성으로 하는 입시를 앞두고 자식을 위해 기도한다면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묘안이 안 나온다. 조그마한 양심이라도 있는 사람의 입에서 우리 아이 시험 잘 보게 해달라는 기도가 나올 수 있을까? 그렇다고 모든 수험생들이 실수하지 말고 자기 실력을 평소대로 발휘하게 해달라고 하나마나 한 기도를 드려야 할까? 아니면 기도란 단지 심리적 안정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기도 대신 심호흡 몇 번 하거나 간단히 자기최면을 걸면 어떨까?


    자식의 입시를 앞두고서, 혹은 생사의 기로에 선 자식을 보면서, 기도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똑같이 기도했는데 왜 하느님은 한 어머니의 기도는 들어주시고 다른 어머님의 기도는 외면하실까? 자식이 암에 걸린 것만도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인데 어머니의 기도가 부족해서 죽었다면 이 보다 더 억울하고 원통할 일이 어디 있을까? 그렇다고 하느님이 모든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기적은 더 이상 기적이 아닐 것이다. 기적은 본성상 특수하고 차별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기적보다 더 깊은 신앙는 보이지 않아도 믿는 신앙

     

    기적적인 치유의 경험, 교통사고에도 불구하고 자기 혼자 살아난 경험 등을 ‘신앙 간증’이라고 혼자 감격해서 하는 것을 듣노라면, 양식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불편하다 못해 괴롭고 욕이 나올 정도이다. 이른바 ‘체험 신앙’이라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아전인수적이고 남에 대한 배려가 없는 비도덕적인 일인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극적인 치유의 경험을 듣는 것보다는 지나간 고통의 세월을 담담하게 털어놓는 이야기가 오히려 더 공감이 가고 ‘은혜’가 되는 것을 느끼는 것은 나만의 경험일까? 


    내가 이렇게 청원기도와 기적신앙에 대해 다소 냉소적으로 말하는 것은 내가 모든 일에 자신만만하기 때문이 아니다. 교만한 마음에서 하는 말은 더욱 아니기를 바란다. 죽음의 문턱에서 하느님께 부르짖거나 부처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감기만 걸려도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가 나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너무나 염치가 없고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어 차마 그렇게 못하는 것이 요즈음 나의 심정이다. 


    종교에서 기적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다. 기적은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를 접하게 하는 수단은 될지언정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나 구원이 아니다. 기적신앙보다 더 깊은 신앙은 아무런 가시적 징표 없이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 신앙이다. 의심하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신앙이 더 위대하다고 하셨다. 기적에 의해 입증되었다고 생각하는 신앙은 사실 매우 위태로운 신앙이다. 기적이 신앙을 ‘입증’해 주는 경우보다 신앙을 ‘배신’하는 경우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많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다. 보이는 징표에 의해 입증된 신앙은 오히려 순수하지 못한 신앙이다. 신앙이 만약 입증된다면 더 이상 신앙이 아니라 지식이 될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가시적 증거나 징표에 의해 압도당해 ‘강요된’ 신앙은 더 이상 신앙이 아니다. 신앙이란 불확실성의 모험을 감수한 자발적 결단이어야 한다. 실존주의자들의 말하는 이른바 ‘믿음의 비약’(leap of faith)이란 것이 필요한 것이다. 실증적 확실성은 신앙과는 무관하다. 보이는 것은 그냥 보고 알면 되지 무슨 믿음이 필요한가?


    하기야 보고도 믿지 않거나 깨닫지 못 하는 사람도 세상에는 허다하다. 같이 기적적인 경험을 하고도 한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여겨 감사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은 엄청난 행운 정도로 여기고 살아간다. 이런 것을 보면 신앙이 기적을 만들지 기적이 신앙을 만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도 치병의 기적을 행하고도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신 것 같다. 

     

    지금 여기서 숨 쥐며 살아 있다는 자체가 기적

     

    믿음이 선행하지 않는 데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신 경우는 복음서에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고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도 기적은 일어난다. 이것이 알 수 없는 기적의 신비이다. 세상에 원인이 없는 현상은 없다는 대전제를 수용한다면, ‘기적’이란 아마도 당분간 우리의 지식이 모자라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붙이는 임시적 이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옛날 사람들이 하늘을 나는 점보제트기를 보았다면 필시 기절초풍해서 나자빠졌을 것이며 사회는 온통 난리가 났을 것이다. 


    깊은 신앙의 체험을 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증언하는 바는 세상에는 기적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순간도 숨을 쉬며 살아 있다는 것, 목구멍으로 편하게 밥을 넘길 수 있고 대소변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으며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은 별들의 향연에 감탄할 수 있다는 것, 눈부신 가을 햇살과 이름 모를 들꽃들,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들에 핀 백합화,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에서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은총의 손길을 느꼈으며, 선한 사람 악한 사람 가리지 않고 내리는 비와 햇빛에서도 하늘 아버지의 무차별적 사랑을 보았다.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무상한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신비를 느끼게 한다. 무(無)에 감싸여 있는 묘유(妙有)의 신비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존재 자체가 기적 중의 기적이다. 온 우주보다도 귀하고 위대한 것이 인간의 생명이라고 한다. 파스칼의 말 대로, 우주는 나를 생각할 수 없지만 나는 우주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나는 우주의 꽃이다”라고 한다면 위대한 착각일까? 착각도 아니고 과장도 아니다. 


    우주 140억년의 역사, 단세포 미생물 하나로 시작된 40억년 생명 진화의 역사가 우주 탄생의 비밀을 이해하고 찬탄할 수 있는 인간의 출현으로 귀결된 이 놀라운 과정이, 의식이라는 작은 등불 하나 켜놓고 하늘을 캔버스 삼아 그려진 황홀한 저녁노을에 넋을 잃기도 하고 밤마다 펼쳐지는 별들의 불꽃놀이를 감상할 수 있는 나라는 존재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한 진통이었다 한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나에게 진짜 기적은 부처님과 예수님 같은 참사람, 바흐나 모차르트 같은 천재 중의 천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았다는 사실이다. 

     

    날씨가 항상 좋은 곳에 살면 좋은 걸 실감 못해

     

    슬픔이 있어야 기쁨도 있다. 고통이 없으면 즐거움도 느끼지 못한다. 날씨가 항시 좋은 곳에 살면 날씨 좋다는 말이 무엇이지 실감하지 못하듯이 기쁨만 있으면 기쁨을 모른다. 고와 낙은 항시 같이 가는 법이다. 하나만 있고 다른 하나는 없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하나만 취하고 다른 하나를 거부하는 것 또한 모순이다. 우리가 아예 슬픔과 기쁨, 고와 낙을 느낄 수 없는 존재라면 몰라도, 생명체가 존재하고 고통과 슬픔을 더 깊이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고와 낙은 항시 붙어 다닌다. 그렇다고 고와 낙을 경험할 수 있는 생명체가 아예 없는 세계가 있는 세계보다 더 좋고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존재하는 세계보다 도 좋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실 그런 세계는 이 방대한 우주에 얼마든지 있다!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한 이 지구라는 푸른 별, 이 우주의 오아시스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기적 중에 기적을 날마다 경험하며 사는 존재들이다. 오죽하면 누가 말하기를 삶이 고달플 때면 목성에서 이민 왔다고 생각하라 했겠는가?


    참된 신앙은 고통을 없애주기보다는 초월적 시각에서 달리 보고 달리 경험하는 능력을 준다. 고통은 초월적 세계를 접하는 은총의 통로가 된다. 고통과 고난을 경험하지 않고 위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을 보았는가? 순수한 신앙은 오히려 고난 속에서 하느님을 더 가까이 느끼고 사랑하게 한다. 


    기적을 보고 믿는 ‘신앙 아닌 신앙’이 아니라 하느님의 딸 테레사 수녀처럼 하느님의 부재를 느끼는 캄캄한 밤을 지나면서도 하느님을 놓지 않는 신앙을 준다. 한국 종교계는 이제 일차원적이고 단선적인 기적 신앙을 과감하게 청산할 때가 되었다. 아니, 거부할 때가 되었다. 종교란 무엇 하는 것인가? 자기를 변화시키고 사회와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것 아닌가? 이기적이고 아전인수적인 기복 신앙은 결코 자기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과 ‘전부 아니면 전무’의 도박을 감행

     

    불교가 오늘날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퍼져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이나 서구 국가들에는 수백만을 헤아리는 이른바 ‘백인불자’들이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동양의 불자들이 그들에게서 배울 점 가운데 하나는 그들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기복신앙과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백인불자들은 우리나라 불자들보다 불교 교리나 사상에 대해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며 명상에도 훨씬 더 열심이다. 그들은 아프면 병원에 가지 부처님께 기도하지 않으며, 입시지옥이란 것이 없으니 입시를 위해 기도할 필요도 없다. 아니, 사실 그들은 그런 것 안 하고 순전히 마음공부 하는 것이 불교라고 생각해서 불자가 된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 매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캄캄한 절망의 터널을 지나온 경험이 없는 사람은 기적에 매달리는 신앙을 함부로 비판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문제는 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고통을 극복하게 만드는가이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은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신앙 태도에도 합당한 말이다. 


    의사의 손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고도 낫지 않는 병을 견디고 감수하는 지혜, 기도 가운데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인생의 더 큰 진리를 깨닫는 지혜를 얻는 것이 신앙이지 의학적 상식과 의사의 손을 대신해 주는 것이 신앙은 아니다. 고통을 없애주기보다는 고통을 안고 사는 지혜와 용기, 여태껏 들리지 않았고 들어도 외면했던 이웃의 고통과 뭇 생명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는 것이 신앙이다.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깊이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고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이 신앙의 힘이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과 ‘전부 아니면 전무’의 도박을 감행한다. 어떤 특정한 사안을 놓고서 하느님과 구차한 거래를 하려 하지 않는다. 신앙은 파트타임 비즈니스가 아니다. 자신의 전 존재, 온 삶을 걸고 하느님과 ‘빅딜’을 하는 것이 신앙이다. 하느님께 몽땅 바치고 몽땅 얻는 ‘빅딜’이다. 죽으면 살리라는 사즉생(死卽生)의 신앙이야 말로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공통으로 증언하는 참 생명의 길, 참 신앙의 길이다.

     

    -길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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