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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소유(無所有)에 심취하지 말라
    ◑解憂所 2011. 7. 28. 07:26

    무소유(無所有)에 심취하지 말라

    -심전(心田)에 진짜 ‘무소유 씨앗’을 심으면 양아치 된다-

     

     법철 /스님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하면서 종각에 있는 대형서점들을 들러 보았는데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남녀 노소, 특히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생들까지 책을 사려고 계산대 앞에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무슨 경천동지할 책이 나왔나? 나는 줄을 서 있는 여고생에게 무슨 책을 사느라 이런 고생이냐며 물었다.
    여고생은 “법정스님이 쓴 ‘무소유’ 책을 사려 한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제서야 장사진을 치고 있는 고객들이 무소유 책을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는 것을 알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책을 사기위해 장사진을 치는 것인가?


     

     그들이 제백사(除百事)하고, 서점에 나타나 다투워 그 책을 구입하려는 것은 첫째, 저자인 법정스님이 죽기 전에 자신의 입적과 함께 자신의 저서들을 출판해서는 안된다는 엄명을 한 것을 일부 언론사와 출판사가 계산된 홍보를 하여 장차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비롯한 저서는 절판이 되어, 희귀본이 될 터이니 절판 되기전에 책을 사야 한다는 구매충동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사실 그날 서점의 매장 아가씨는 “법정스님의 책이 곧 절판이 되니 빨리 사라”는 권고를 외치다시피 하고 있었다.


     

     나는 대량판매를 하는 매장의 아가씨에게 축하하면서, “날자로 보아 절판의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아직도 잔고가 있소?”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가씨, “책은 창고에 무진장 있고, 주문하면 무진장 도착하니 걱정 없다”는 귀뜸이 돌아왔다.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절판이요, 희귀본이라는 홍보에 정신없이 몰려와 지갑을 열어 다투워 사는 착한 중생들, 즉 순진한 구매자들이 우습기조차 했다. 저자는 입적했지만, 인세(印稅)를 챙기는 사람, 출판사, 서점들이 재미를 톡톡히 보는 듯 했다.


     

     나는 법정스님이 죽음을 맞이하고 난후 한국사회가 그의 저서 무소유에 대해 기립박수치듯 언론이 보도하는 것을 보고,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어 각성을 촉구하는 차원에서 ‘무소유(無所有) 노래에 연호하는 남녀들’이란 글을 써 발표한 적이 있다. 나의 글에 여러 독자층에서 찬반논이 분분했다.


     

     그런데 적지 않은 독자들이 나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은 법정스님을 무조건 존경하는 소위 팬이요, 지지자들이다. 그들은 나의 글에 대해, 즉 무소유를 실행한 휼륭한 스님을 시기 질투하여 모략 중상을 해댄다며 천하에 몹쓸 ‘땡중’이라는 혹평도 하고, 승려도 아닌 “개독 먹사”와 결탁한 나쁜 놈이라는 것이다. 진실을 알고, 지나친 찬가는 부르지 않는 것이 좋다, 는 나의 글은 오히려 욕설 공격을 받는 촉발제가 되고 만 것이다. 지금도 인터넷 상에서 나를 욕하는 글이 수다히 게재되어 있는 것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한다. 어찌하나? 표현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인 것이다.


     

     우리 불가에 도저히 제도하지 못할 중생을 지칭하여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제도하지 못할 자”라는 말이 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지지하여 나에게 욕설을 퍼붓는 자들이야 말로 “천불이 출세해도 고집된 관념에서 해탈하지 못할 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진정 법정스님과 함께 한솥밥을 먹고 살아본 적이 있던가? 글(文)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지만, 작가는 자신의 계산에 의해 얼마든지 독자의 인기에 영합하는, 비유컨대 붕어빵, 국화빵 등을 생산한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작가의 책보다는 그 작가가 어떻게 인생살이를 하는 가를 통찰해야 비로소 그 작가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또 욕설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앞섰지만, 무소유 책을 각기 한권씩 사서 자랑스럽게 들고 친구들과 환담하는 남녀 학생들 네 명을 불러 세웠다. 나는 그들에게 무소유 책은 인생에 참고로 삼는 것은 좋으나, 인생을 진짜 무소유사상으로 살아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어리둥절한 그들에게 나는 “진짜 무소유 자(無所有 者)”를 보여주겠네.“ 하고 종각역 지하도 조계사 가는 쪽 바닥에 겨울, 봄, 여름, 가을, 얻어먹고 잠자는 땟국이 절은 검은 옷을 입은, 씻지 않은 시커먼 얼굴에 수염과 머리가 봉두난발(蓬頭亂髮)인 걸인남자를 가리켰다. 그 걸인은 위선의 무소유자가 아니었다. 진짜 무소유자인 것이다. 나는 이제 인생을 시작하는 꽃다운 나이의 학생들에게 ”진짜 무소유자가 되어 지하도의 걸인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간곡히 충고했다.


     

     나는 남녀 학생들에게 우리 육신을 운전하는 운전사는 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 마음의 심전(心田)에 무슨 씨앗을 뿌리고 가꾸냐에 따라 인생은 변해버린다고 강조했다. 그들에게 무소유가 아닌 유소유자(有所有者)가 될 것을 강조했다. 진짜 무소유자가 되면 결론은 지하도의 걸인이 되는 것이요, 유소유자가 되어 자리이타(自利利他) 정신으로 살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작별했다. 인생을 시작하는 청소년인 그들은 세계의 위인전, 불우한 환경에서 성공한 성공전과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을 가슴에 각인시켜야 할 나이였다.


     

     작고한 김수환 추기경이 법정스님의 초청에 의해 길상사에서 법문 아닌 설교를 한 적이 있었다. 김추기경은 마이크를 통해 길상사 신도들에게 “법정스님은 복이 많은 분입니다.”고 첫마디를 했다. 무슨 복? 불교신도들의 눈이 일제히 김추기경을 주목했다. 김추기경은 법정스님이 5,000원짜리 염주를 대원각 주인보살의 목에 걸어주고, 1,200억짜리 대원각을 시주받은 동아일보 1면 탑기사를 인용하여 축하를 한 것이다. 김추기경 자신은 평생 사제의 길을 걸어왔으나 “법정스님 같은 복은 없다”면서 법정스님의 다복(多福)을 거듭거듭 축하했다. 진짜 축사였을까? 자신은 그런 인생은 살아오지 않은 것이라는 자신만만한 깨우침이 아니었을까?


     

     나는 지난 날에 ‘기생과 불교’라는 제하의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미모의 젊은 나이 때는 악착같이 돈을 벌기 위해 몸과 마음을 던졌던 기생이, 마침내 수중에 만금(萬金)을 쥐었지만, 병든 퇴기(退妓)가 되면, 저승차사를 두려워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종교를 찾는 경향이 많다.


     

     이승만 대통령 빼고, 고관들과 부호들을 모두 혈(穴)의 동서지간을 만들어 돈을 받아 냈다는 항설이 있는 김모(某) 서울 장안 명기도 중병이 들었을 때, 지옥과 극락을 친히 목도한 것처럼 이야기를 잘하는 모(某) 승려의 설법(?)에 감복하여 1천억정도의 전재산을 바쳤다. 이유는, 지옥을 면하고 극락행 특별대우에 감동받은 것이다. 대원각의 주인보살은 집안형편이 곤궁하여 기방에 투신한 15세 동기(童妓)출신이다. 그녀는 지난날, 지탄받은 일본인들의 ‘기생관광’의 대모(代母)로 돈을 갈퀴로 끌어 당기듯 했다고 자랑했다. 결론은, 그동안 나쁜짓의 인과응보인 지옥을 면하고, 극락행 특별대우 티켓으로 전재산을 바친 것이다.


     

     웃지 못할 전해오는 항설(巷說)에 의하면, 장안의 내노라하는 남자들의 돈은 미색의 기생이 가무와 미주가효(美酒佳肴), 육탄돌격으로 받아내고, 마지막에는 종교인들이 그 기생이 악착같이 번 돈을 모두 받아낸다는 말이 있다. 어쨌거나 기생돈 1,200억을 세치 혀로 받아내어 기생집을 사찰로 변화시킨 것은 한국사회는 물론 국제사회에 신화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소문을 들은 경향의 일부 승려들은 돈많은 퇴기를 찾아 첫째, 무소유를 강조하고, 둘째, 지옥고를 면하고, 극락행 특별대우 티켓을 팔려고 동분서주(東奔西走)한다는 설이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 식의 항간(巷間)의 풍설일 것이다. 속세에는 언제나 억측이 난무하지 않은가?


     

     타인을 용서하고 자비로 보듬어야 할 내가 한켠으로 미워하는 승려부류가 있다. 예컨대 조계종 사찰을 제앞으로 등기하고, 백화점까지 운영하는 승복입은 자가 법당을 찾은 착한 신도들에게 자신의 무소유를 강조하면서, 보시, 헌금을 강요하는 짓을 하는 것이다. 작금에는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돈있는 부자승들이 무소유를 주창(主唱)하는 세상이다. 나는 아예 어느 누구에게도 무소유를 말하지 않는다. 어찌 나뿐일까?


     

     ‘무소유’ 타령을 해서 떼 돈 번 승려 애기를 해보자.
    예전에 원주 ‘소쩍새 마을’의 촌장이라는 일모(某) 승려가 정신질환 및 갈 곳없는 남녀들을 약간 명 도우면서 무소유 타령을 줄기차게 했었다. MBC에서 그를 돕는 TV방송을 두 번 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불교신도 36만명이 성금을 온라인 계좌로 송금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소쩍새 마을 재무의 증언에 의하면, 하루에 평균 5억, 많으면 7억이 송금돼왔다는 것이다. 떼돈이 생기자 일모(某) 승려는 정신이 나가버렸다. 첫째, 여성들을 성폭행하고, 둘째, 제2 소쩍새 마을, 제3 소쩍새 마을을 한다고 자회사(子會社) 늘리듯 하더니 졸지에 성폭행 피해자들에게 고소 당했다. 그는 탈토(脫兎)처럼 중국으로 도주했다. 그는 어느 중국인들이 권하는 마약에 손대 몽환(夢幻)속에 살다가 결국 급사했다. 진짜 무소유를 실천하는 승려라면 분명 장수했을 것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고해대중의 일평생 자나깨나 화두는 돈이다. 착하고 좋은 남녀가 돈 때문에 울고 웃고, 성공과 실패자가 되고 천인공노할 범죄자가 되고, 남자는 지조를 꺾고, 여자는 정조방매(貞操放賣)까지 하는 세상이다. 일생을 조계종의 처자(妻子)없는 비구승으로 종사(宗師)급에 있는 나도 수중에 돈이 없으면 서을 나들이를 하지 못한다. 누가, 일천원짜리 빵덕하나 보시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돈 없이 식당에서 공밥 먹고, 무임승차를 했다면, 즉시 멱살 잡혀 파출소행을 당할 것이다. 그런데 항차 속인이 무소유론에 심취하여 책을 구매하려고 다투워 경쟁하고, 소장하여 두고두고 독서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돈이 전부인 듯한 더러운 세상, 초연해 보자는 심산인가?


     

     60년 중반, 필자는 해인사에서 법정스님을 처음 해후했다. 그는 해인사 해우소(解憂所) 가는 길 옆 관음전 옆 작은 건물의 끝방에 기거하면서 책을 읽고 글쓰기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 때 불교계의 유일한 언론 불교신문에 ‘입석자’라는 단문(短文)이 게재되었다고 나에게 자랑하던 모습이 엊그제 같다. 해인사는 눈이 많이 내린다. 눈내리는 겨울 밤, 나는 해우소를 가다가 밤새 공부하는 법정스님을 보며 늘상 감탄했다. 나는 법정스님이 훗날 한국 불교계에 불교중흥의 큰 족적을 남길 것이라 예측했었다. 불교가 중흥되려면, 법정 스님 같이 잠을 자지않고, 날을 하얗게 밝히면서 책을 읽고 글쓰기를 하는 승려들이 다다익선(多多益善)으로 많아야 한다는 것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무소유 사상은 물욕에 초연하는 의미는 충분히 부여한다. 그러나 그것은 승속간에 영원한 희망사항이라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 무지개는 손으로 잡을 수 없는데, 무지개를 잡겠다는 것과 같은 희망사항인 것이다. 법정스님처럼 퇴기가 1,200억을 시주하고, 재벌 회장부인이 후원하고, 경향의 남녀신도들이 성금을 보내면 받는, 그런 무소유는 승속간에 실천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아무 대책 없이 진짜 무소유를 실천하면 졸지에 종각 지하도의 걸인, 아니, 노숙자가 되고 만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끝으로, 무소유의 반대인 유소유(有所有)는 악(惡)도 죄(罪)도 불의(不義)도 아니다.
    나는 이글을 읽는 인연있는 분들이 크든 작든 땀 흘려 노력한 댓가를 소유하며, 분수를 알고 자족(自足)하며, 나보다 못한 남을 도우면서, 대한민국을 조국이요, 정토(淨土)로, 사랑하고, 보위하여 후손만대(後孫萬代)에 전하는 삶을 살 것을 권장한다. 이 얼마나 멋지고 좋은 인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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