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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것은 상호의존에 의해 생기고 없어져
    ◑解憂所 2008. 6. 30. 07:24

    모든 것은 상호의존에 의해 생기고 없어져

    항상함과 끊어짐의 양변


    일반인들이 불교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갖게 하는 예의 하나가 “죽은 다음에 항상한 그 무엇이 있다”는 생각과 “죽은 다음에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 사이에서의 표류이다. “항상하다”는 생각을 ‘상견(常見)’이라고 하고, “이어지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단견(斷見)’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이 두 가지 견해를 다 부정한다.

    언뜻 생각하면 불교는 육신이 죽은 다음에도 죽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고 가르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이 상호 의존에 의해서 생기고 없어지는 연기법에 의하면, 우선 항상한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어떤 것이 존재하려면, 기본적으로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한다. 두 가지 이상의 것이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을 차지할 수 없으니, 설사 흡사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시간 공간의 환경에 있을 수가 없다.
    불교는 자연과학적인 의미에서 시간 공간의 차이를 들어 동일한 것이 없다고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물간의 상호 의지뿐만 아니라 사물과 인간의 마음과의 의존관계를 보여 주려고 한다. 동일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관점이 없으니, 항상한 것이 부정될 수밖에 없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좋든 나쁘든

    그것으로부터 다음 것이 생겨나


    볍씨를 논에 심어서 벼가 나오고 정제하면 쌀이 된다. 보리나 밀알의 껍질을 발효시키면 누룩이 된다. 쌀과 누룩이 혼합해서 발효되면 술이 된다. 술이 더 발효되면 식초가 된다. 볍씨, 쌀, 누룩, 술, 식초가 연속적으로 생긴다고 할 때, 앞의 것과 뒤의 것은 분명히 다르다. 같은 쌀이라고 하더라도 볍씨와 수확된 쌀은 같은 것이 아니다.
    술과 식초가 비슷하기는 하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끊임없이 변하는 과정에 있다. 쌀과 누룩은 우리에게 항의할 지도 모른다. “자연적으로 술이 되고 누룩이 되었는데, 왜 사람들이 쌀과 누룩이 죽고 술이 태어나고, 술이 죽고 식초가 태어났다 하느냐?”고 말이다. 불교는 궁극적으로 생사가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사 없음을 가르치려고 한다. 단지 우리가 생사를 가르는 눈으로 보기로 말하면, 동일한 것의 연속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죽은 다음에 아무 것도 없지는 않다. 볍씨 다음에 쌀이 있고, 쌀과 누룩 다음에 술이 나오고, 술 다음에 식초가 나온다. 우리가 쉽게 생각되는 것들만의 단계를 열거했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단계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변환되더라도 이어지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석존은 상견과 단견의 양 극단을 타파하기 위해서 불의 비유를 든다. 집에 불이 났다고 치자. 책상, 책, 연필, 노트 등을 연속적으로 태울 때, 앞의 불과 뒤의 불이 같지 않다. 그렇지만 앞의 불이 없으면 뒤의 불이 있을 수 없다. 또 연료가 없어서 불이 껴졌다고 할 때, 그 불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연료에 불을 붙이면 언제든지 불이 다시 나타난다. 불이 타지 않는다고 해서, 완전히 죽어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저 항상함과 끊어짐의 양변을 부정하는 가르침을 어떻게 활용해서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까? “잘 나가는 위치”로 남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남이거나 나일 때, 항상함이 없음을 관해서 상처를 덜 받을 수 있고, 나의 방자해짐을 막을 수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죽었을 때, 세상의 보이는 것 모두를 그의 환생으로 생각하여 사랑하고 위할 수 있다.

    또 단견을 경계할 때, 냉소주의나 은둔 회피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현재 눈앞에 보이는 것이 좋든 나쁘든, 그것으로부터 다음의 것이 생겨난다. 추한 것은 아름답게 되도록, 악한 것은 선하게 되도록, 최선을 다해 참여해야 한다. 현재 내가 짓는 업은 반드시 다른 업으로 이어지니, 악을 행할 때는 그것을 없애거나 줄이려는 마음을 내고, 선을 행할 때는 계속하려는 마음을 내야 한다.

    상견과 단견의 양변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더라도, 현실 속에서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실생활의 경계에 너무 집착하거나 도망치려하기 때문이다. 도를 닦음이 별 것이겠는가. 내가 어는 쪽에 빠져 있는지를 관하고 벗어나려 하면, 그게 바로 최선의 수행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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