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불교의 4대 수행법 II
    #佛敎 2008. 1. 24. 07:32
    의교관행(依敎觀行)의 간경
     
    불교의 4대 수행법, 곧 부처님의 궁전으로 들어가는 4대문 가운데 북대문에 해당하는 간경문(看經門)은 일반적으로 의교관행문(依敎觀行門)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을 보고, 그 경전에 의거하여 관행(觀行)을 닦음으로써 해탈의 경지를 체득하는 수행법이다.
     
    여기에서는 관행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하고, 경전을 공부하는 간경의 기본요령에 대해서만 살펴보고자 한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는 <금강경> <아미타경> <지장경> <천수경> <법화경> 등을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읽는 불자들을 많이 찾아볼 수가 있다.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경전을 독송하는 불자들 중에는 한문으로된 경전을 한글 음만 취하여 줄줄줄 읽어내려가는 사람이 있다. 물론 이렇게 할 때도 '독경(讀經)' 자체의 공덕이 없지야 않겠지만, 뜻을 새기지 않고 한문의 음(音)만을 외우는 것은 혼백을 잃은 육체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옛 사람들은 한문을 가르칠 때 "글은 글, 나는 나(書者書我者我)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글과 글을 읽는 '나'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럼 어떻게 경전을 읽어야 하는가?
     
    첫째, 경전 속의 뜻을 새기며 읽어야 한다.
    <초심>을 보면 "모름지기 글의 뜻을 관하며 읽어라(須誦門觀意)"는 말씀이있다. '뜻을 관(觀)한다'고 할 때의 '관'은 경전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외우는 것을 넘어서서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읽고 마음으로 느끼라는 것이다. 간경의 '간(看)' 또한 마찬가지이다 '看'은 곧 '觀'이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경전의 내용이 '나'의 마음속에 또렷이 살아 있도록 보는 것, 경의 내용을 '나'의 것으로 만들면서 보는 것이 간경이다.

    경전의 내용을 나의 것으로 만들며 읽는 것과 뜻을 모른 채 읽는 것과의 차이를 잘 입증하는 대표적인 예는 바로 영가천도를 위한 독경의 경우이다. 특히 요즈음은 승속을 막론하고 영가천도를 위해 어떠한 경을 49일 또는 백일 동안 읽어주는 독경이 널리 행하여지고 있다.
     
    그런데 독경을 할 때 그경전의 뜻을 새기면서 읽지 않게 되면 그 경전의 내용은 영가에 전달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가는 소리를 듣지 않고 독경하는 사람의 속마음을 읽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수십 년 전 합천 해인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해인사 강원의 학인(學人)들이 장경각 뒤쪽으로 잣을 따러 갔다. 그런데 그곳의 잣나무는 위낙 키가 커서, 이쪽 나무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다른 나무로 올라가게 되면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잣을 따는 사람들 중에는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그냥 건너뛰는 일이 많았다.
     
    그날도 많은 학인들이 나무를 건너뛰며 잣을 땄는데, 한 학인이 자칫 실수하여 나무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마침 나무 밑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어 몸은 다치지 않았지만, 호흡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스스로가 죽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그 학인의 영혼은 잠깐 사이에 속가의 집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속가의 집에 들어서자 식구들이 모두 머리가 아프다며 드러누워 버리는 것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서있는데, 그 동네의 무당할머니가 바가지에 김치국밥을 풀어서 살살 다가오더니 머리에 확 덮어씌우고는 칼을 들이대며 소리를 쳤다.

    "네 이놈, 객귀(客鬼)야, 어서 나가거라."
    그는 깜짝 놀라 뛰쳐나오며 중얼거렸다.

    "에잇, 빌어먹을 집. 내 생전에 다시 찾아오나 봐라. 나도 참, 중이 된 몸으로 무엇하러 집에 왔나? 더군다나 사람을 이렇게 푸대접하는 집에."

    그리고는 해인사로 돌아와보니, 재(齋)가 있는지 독경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소리가 이상하여 가까이 다가가서 유심히 들어모니,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은 '은행나무 바리때' 뚝딱뚝딱, '은행나무 바리때' 뚝딱뚝딱 하고 있고, 요령을 흔드는 스님은 '제경행상' 딸랑딸랑, '제경행상' 딸랑딸랑 하고 있었다.
    '참 이상한 독경도 다 있구나' 생각하며 열반당(涅槃堂)간병실로 가보니 자기와 꼭 닮은 사람이 누워있는 것이었다. 그는 누워있는 사람을 발로 툭 걷어찼고, 순간 그는 다시 살아났다. 다시 살아난 그는 자신을 위해 독경을 해주던 도반스님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내가 들으니 너는 '은행나무 바리때'만 찾고, 너는 '제경행상'만 찾던데, 도대체 그것이 무슨 소리냐?"
    그러자 독경을 했던 두 도반스님은 매우 부끄러워하며 고백하였다.

    "나는 전부터 은행나무로 만든 너의 바리때를 매우 갖고 싶었어. 너의 유품중에서 그것만은 꼭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어찌나 강하게 나던지...... 너를 위해 독경을 하면서도 '은행나무 바리때'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네. 정말 미안하네."

    ""나도 역시 그랬다네. 네가 평소에 애지중지하던 <제경행상 諸經行相>이라는 책이 하도 탐이 나서......"
    이 이야기는 독경을 할 때 마음을 모아 하지 않고 입으로만 하는 경우, 영가가 어떻게 알아듣게 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 이야기이다.

    모름지기 독경을 할 때는 마음을 잘 모아서 해야한다. 그야말로 간경(看經)이 되어야 한다. 영가천도를 위한 독경이든 소원성취를 위한 독경이든, 경전을 읽을 때는 경전 속의 내용을 또렷이 새기며 읽어야 한다.
     
     정녕 경전을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읽고 마음으로 느끼는 간경이 되어야 독경 그 자체가 기도가 되어, 영가를 천도할 수도 있고 소원을 성취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아가 경전을 마음으로 보면 불경의 뜻, 곧 부처님의 말씀과 '나'는 차츰 하나가 될 수 있고 마침내는 큰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꼭 명심하기 바란다.
     
    둘째, 경전을 읽다가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말고, 꼭 새겨두었다가 스님 등 선지식(善知識)들께 여쭈어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때로는 찾아간 선지식도 모르는 경우가 있을 것이요, 선지식이 올바로 풀이해주어도 스스로의 귀가 어두워 바로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한 경우라도 포기하지 말고, 그 뜻을 계속 밝히고자 노력해야 한다.
     
    중국 당나라 때에 살았던 이발(李勃)은 책을 많이 읽은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사람들은 그가 책을 만권이나 읽었다고 하여, 그를 '이만권(李萬卷)'이라고 불렀다. 어느날 이발은 <유마경>을 읽다가, 불가사의품(不可思議品)의 '수미산(須彌山)이 겨자 씨앗속에 들어가고 사대해수(四大海水)가 하나의 털구멍 속에 들어간다'는 법문에 이르러 꽉 막혀버렸다.
    이발은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수 없어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여산의 업종사(業宗寺)에 있는 지상(智常)스님을 찾아가서 여쭈었다.

    "유마경에 '수마산이 겨자씨속에 들어가고 사대해수가 하나의 털구멍 속에 들어간다'는 법문이 있던데, 그렇게 큰 산과 넓은 바다가 어떻게 겨자씨나 털구멍처럼 작은 것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지상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반문하였다.
    "사람들이 그대를 '이만권'이라 한다지?"

    "예."

    "그 까닭이 무엇인가?"

    "제가 이제까지 본 책이 만 권 정도 된다고 하여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 많은 책을 어떻게 그 작은 머리 속에 다 넣었는고?"

    지상스님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이발은 마음이 확트여 크게 깨달았다.
     
    이 이야기 속의 '이만권'처럼, 경전을 읽다가 생겨나는 의문을 그냥 모른 체 하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다 보면, 좋은 인연을 만날 때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적당한 이해, 적당한 해결에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은 것이라도 철두철미하게 뚫고 들어가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 무엇 하나든 정성을 다하여 나아갈 때 참된 결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디 간경을 할 때 대충대충 하지 말고, 난해한 구절이나 의문이 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풀릴 때까지 나아가기를 당부드린다.
    셋째, 처음 경전을 공부할 때는 여러 경전을 두루 섭렵하기보다는 하나의 경전을 택하여 확실히 익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도삼아 독경을 하거나 경전을 공부하는 불자들중에는 <반야심경> <금강경> <법화경> <천수경> <관음경> <지장경> 등 영험이 크다고 하는 경은 무엇이든 취하여 외우거나 공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한 가지 경전을 옳게 통달하면 나머지 경전들도 저절로 통달이 되는 것이므로, 간경하는 힘이 잘 모일 때까지는 하나의 경전을 부지런히 읽으면서 공부하는 것이 좋다.
    중국 수나라 때의 승려인 혜공과 혜원은 사형 사제 사이로, 젊은 시절 '기필코 불도를 성취하겠다'는 서원을 함께 세웠다. 그리고 사제인 혜원스님은 장안으로 가서 여러 경전을 남김없이 독파하여 대강사가 되었고, 혜공스님은 강화로 가서 오로지 <관음경>만을 외우며 정진하였다.
     
    두 스님은 헤어진 지 30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때 혜원스님은 여러 경전의 심오한 도리를 쉴사이 없이 계속하였으나, 사형인 혜공스님은 한마디의 응답도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홀로 열변을 토하다가 멋적어진 혜원스님은 혜공스님께 물었다.

    "사형께서는 도무지 말이 없으시니, 그 동안 어떤 공부를 하신 것입니까?"
    나는 원래 천성이 우둔하지 않은가? 그래서 관음경 한 권만을 읽고 외웠을 뿐이라네."
    "관음경이라면 세속의 불자들도 모두 외울 수 있는 경전이지 않습니까? 사형께서는 나와 더불어 도과(道果)를 성취하겠다는 서원을 세웠거늘, 30년이 지나도록 겨우 관음경 한 권만을 외웠단 말이오? 이것은 우둔한 것이 아니라 나태한 증거요. 서원을 저버린 사형과는 그만 인연을 끊겠소이다."

    혜공스님은 흥분한 혜원스님에게 차분히 말하였다.

    "관음경이 비록 적은 분량의 경전이지만 역시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더냐, 그 말씀을 믿어 받들면 무량한 복을 받을 것이요, 그 경전을 경솔히 생각하면 죄를 짓게 되는 법이다. 그렇게 성만 내지 말고, 서로의 인연을 끊기 전에 내가 외우는 관음경을 한 차례만 들어주게."

    "허허, 관음경은 내가 백번도 더 가르친 것인데, 어찌 시끄럽게 들으라고 하시오?"

    "불법이 사람을 키우는 것이지, 사람이 불법을 키우는 것은 아니네. 다만 지성으로 부처님 말씀을 들으면 그만이지, 왜 사람을 핑계하여 법까지 버리려 하는가?"

    이 말을 무시할 수 없었던 혜원스님은 마지못해 혜공스님의 <관음경> 독경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혜공스님이 경의 제목을 읽자 이상한 향기가 방안에 충만하였고, 본문을 읽어나가자 천사의 음악소리가 울려퍼지면서 네 가지 꽃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천상의 음악소리는 갈수록 미묘한 곡조로 바뀌었고 꽃비는 분분히 휘날리더니, 혜공스님이 관음경 외우기를 끝내자 꽃비도 음악소리도 일 순간에 멎는 것이었다. 눈앞에서 전개되는 기적에 깜작 놀란 혜원스님은 자신의 오만함을 깊이 뉘우치고, 혜공스님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였다.

    "한갖 냄새나는 송장에 불과한 혜원이 감히 불법을 깊이 깨달았다며 자부하고 살았습니다. 부디 저를 깨우쳐 주십시오"
     
    모든 경전을 두루 섭렵한 혜원스님과 <<관음경>> 하나만을 30년 동안 외운 혜공스님. 이 두분 스님 중 어느 스님의 도력이 더 높은 것일까? 모든 사람이 다 혜공스님을 택할 것이다.
     
    간경수행을 하는 불자라면 마땅히 혜원이 아닌 혜공스님을 닮고자 노력해야 한다. 물론 근기(根機0에 따라서는 많은 경전을 접하여야 많이 깨우치는 사람도 있겠지만, 불법의 세계는 그야말로 '일통일체통(一通一切通)'이다. 하나를 통달하면 모든 것을 통달할 수 있게 된다. 한 경전을 요달하면 모든 경전의 뜻을 꿰뚫을 수가 있다. 오직 성패는 내가 그 경전과 하나가 되어 공부를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가 되어 공부를 하다보면 차츰 삼매에 젖어들게 되고, 마침내는 혜공스님과 같은 신통묘용이 저절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간경공부를 하고자 하는 불자들에게 이렇게 권하고 싶다.

    "만약 지금 특별히 공부하고 있는 경전이 없다면 양이 많은 경전보다 짤막하면서도 심오한 <반야심경>을 외우라"고......

    정녕 짧디짧은 <반야심경> 하나라도 분명히 공부하여, 그 경전의 뜻을 조금의 의문도 없이 해득할 수 있을때까지 공부를 지어가면, 무량한 공덕과 함께 참으로 깊은 경지를 틀림없이 성취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반야심경> 이외의 다른 경전이나 책을 보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경전, 곧 <반야심경> 등을 '나'의 중심으로 삼고 다른 불경이나 불교서적들을 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공부하면 결국은 모든 가르침이 <반야심경>의 공삼매(空三昧)를 채득하는 및거름이 되어 흔들림없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부디 우리 불자들이 이제까지 열거한 간경공부의 기본요령을 잘 터득하여 꼭 북대문을 통과하기 바란다.
     
    진언총지의 주력문(呪力門)

    4대문 가운대 동대문에 해당하는 주력문은 진언총지문(眞言總持門)이라고도 한다. 진언총지문의 '眞言'은 참된 말, 진리의 언어 등으로 풀이되고, '總持'는 범어 다라니를 의역(意譯)한 말로서, 모든 장애를 벗어나게 하고 한량없는 복덕과 공덕을 다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다. 곧 진언과 다라니는 다른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일반닥으로는 범어로 된 짧은 구절을 진언(眞言) 또는 주(呪)라 하고, 긴 구절로 된 것을 다라니 또는 대주(大呪)라고 한다. 이러한 용어 풀이를 통하여 보면 '주력문 진언총지문'이 밀교(密敎) 계통의 수행체계라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진언총지의 주력문을 이야기하기 전에 밀교에 대해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밀교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주력수행법을 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밀교는 부처님께서 깨우친 진리를 은밀하게 보여주는 대승 불교의 한 교파이다. 밀교가 성립될 당시의 인도불교는 실천행보다 이론적인 탐구를 더 중요시하고 있었다. 또 중생을 구제하는 승려보다는 학문을 익히며 대접받는 승려들이 많았던 시기이다.

    이러한 불교계의 흐름은 교학(敎學)의 찬란한 발전을 가져오는 장점도 있었지만, 많은 신도를 잃게 되고 교단의 위축을 스스로 가져오는 단점도 있었다. 밀교는 바로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 실천을 위주로 한 대중불교를 펼치려는 뜻에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당시까지 발전되어왔던 반야공사상(般若空思想)과 유식사상(唯識思想)을 계승 발전시킴과 동시에, 힌두교와 민간신앙을 폭넓게 받아들인 다음 그것을 다시 불교적으로 정립한 것이 밀교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밀교의 근본경전으로는 <대일경 大日經>과 <금장정경 金剛頂經>이 있다. 이중 <대일경>은 밀교의 이론적 원리를 밝힌 경전이고, <금강정경>은 밀교수행법의 체계를 밝힌 경전이다. 나아가 이들 경전에서는 법신불(法身佛)인 대일여래(大日如來)의 근본 서원력에 의지하여, 대일여래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나'의 근본자리를 찾는 태장계(胎藏界) 수행법과 대일여래와 같은 지성(智性)을 발현시키는 금강계(金剛界) 수행법을 닦아 익히면, 이 육신을 지닌 채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즉신성불을 이룰 수 있는가?
     
    몸으로는 단정히 앉아 여러 가지 수인(手印)을 맺고, 입으로는 진언을 염송하고, 마음으로는 대일여래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을 신밀(身密)·구밀(口密)·의밀(意密)의 '삼밀가지(三密加持)' 수행법이라고 한다. 곧 '나'의 몸과 말과 뜻, 부처님의 몸과 뜻, 이 둘이 서로 은밀하게 감응하여 일치를 이루면 현생에서 능히 성불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주제로 삼고 있는 '진언총지의 주력문'은 바로 이 삼밀가지 수행법을 뜻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주력문은 신 구 의 삼밀을, 모두 갖춘 수행법이 아니라, 진언이나 다라니만을 열심히 외우는 구밀(口密)의 수행에 한정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입으로만 외우는 이 구밀수행법, 곧 주력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진언(眞言, 呪)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힘(呪力)이 있기 때문이다. 그 힘은 어떠한 힘인가? 제불삼보감통력(諸佛三寶感通力)이다. 모든 부처님과 삼보의 감통력이다.
     
    우리가 진언이나 다라니를 지극정성으로 외워나가면 제불삼보와 그대로 감통하여 소원을 성취할 수도 있고 깨달음을 이룰 수도 있는 것이다.
     
    조선 말기, 고(高)씨 성을 가진 한 젊은이는 뜻하지 않게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온몸이 곪아 터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떨어져나가 양쪽 엄지 손가락만이 남게 되었다.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겨나게 된 그 젊은이는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한술 밥을 빌어먹으면서 모진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젊은이는 정자나무 밑에서 한 노스님을 만났고, 기도성취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다가 자신의 병에 대해 여쭈었다.

    "스님, 저에게 그 주문을 가르쳐 주십시오."

    노스님은 자상하게 그 주문을 써주고, 직접 여러 차례 읽어주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 아리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사다바야

    마하사다바야 마하가로니가야 다나타

    아바다 아바다 바리바제 인혜혜 다냐타

    살바다라니 만다라야 인혜혜 바라마수다 못다야

    새바라야 살바돗타 오하야미 사바하
     
     
    젊은이는 곧바로 동네 앞에 있는 개천가로 가서 잔 돌 10만개를 모았고 아침저녁 동네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관세음보살모다니>를 외우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한번 외우고는 돌을 하나 치우고 또 한 번 외우고는 돌을 하나 치우고....... 이렇게 하다보니 돌 10만개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젊은이는 그 날밤 감미로운 한 편의 꿈을 꾸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한 여인이 젊은이를 찾아와 두팔로 안더니 개천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정성껏 온몸을 씻어주는 것이었다. 젊은이는 말할 수 없는 상쾌함을 느끼고 꿈에서 깨어났는데 그토록 자신을 못살게 굴었던 문둥병이 깨끗이 치료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뒤 젊은이는 출가하여 덕산(德山)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경주 석굴암에서 일평생을 기도하며 지냈다고 한다.

    이렇듯 진언이나 다라니를 열심히 외우면 누구나 삼보의 감통력을 입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주력수행을 하는 불자들에게 한 가지 더 주문하고 싶은 것은 입으로 진언을 외움과 동시에 앞에서 말한 삼밀가지 중 의밀(意密)을 함께 행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의밀가지가 아주 특별한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진언을 외우면서 그 진언의 제목에 해당하는 모습을 마음으로 떠올리는 관상법(觀想法)이다.

    경전을 읽을 때 뜻을 새기듯이 진언이나 다라니를 외울 때 그 장면을 관상하게 되면 주문의 힘을 크게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된다.
     
    영가천도를 위한 관음시식(觀音施食) 중 4다라니를 이울 때를 예로 들어보자.

    4다라니는 변식진언(變食眞言)·시감로수진언(施甘露水眞言)·일자수륜관진언 (一字水輪觀眞言)·유해진언(乳海眞言)의 넷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진언들을 세 번 또는 일곱 번을 외운다.

    먼저 변식진언을 외움에 있어 첫 번째는 밥 한 그릇이 일곱 그릇으로 변하는 것을 관하고 두 번째는 일곱 그릇이 마흔아홉 그릇으로 변하는 것을 관해야 하며 세 번째는 또 7배, 그렇게 일곱 번을 외우면 처음 차려놓은 공양물은 수십만배로 변한다. 그렇게 되면 모든 영가들이 아주 만족스럽게 포식할 수가 있다.
     
    감로수진언을 외울 때도 마찬가지이다. 옛말에 '하늘 사람은 물을 유리궁전으로 보고 사람은 물로 본다. 고기는 물 속에 살면서도 물을 보지 못하고 귀신은 물을 불로 본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귀신은 물을 불로 보기 때문에 감로수 주는 것을 생각하면서 감로수진언을 외워주지 않으면 물을 마실 수가 없다고 한다. 실로 변식을 이루어내고 감로수를 마실 수 있게 하는 것은 주문의 힘과 관상력(觀想力) 삼보의 신력(神力)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4다라니뿐만이 아니라 어떠한 진언을 외울때도 마음으로 관하여야 한다.

    그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우리 불가에서는 진언이나 다라니의 뜻을 굳이 풀이하지 않고 있다. 풀이를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진언 그 자체의 신비로운 힘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범은(梵音) 그대로 읽는 것이다. 그대신 주어진 것이 관상법이다.
     
    광명진언·아미타불본심미묘진언·옴마니반메훔·대비주·능엄주 그 어떠한 주력을 행할지라도 꼭 관상하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나아가 천수경 등과 같이 경문과 주문이 함께 있는 경전을 외울 경우 진언이나 다라니를 외울 때 관상을 하고 경구절을 외울 때는 뜻을 새기며 읽게 되면 그 효과는 가히 불가사의한 것이다.
     
    이상의 사항을 부디 명심하여 진언총지의 주력문을 잘 통과하기 바란다.
     
    지난달과 이번달 2회에 걸쳐 우리는 참선·염불·간경·주력이라는 불교의 4대 수행문에 대해 살펴보았다.
     
    동서남북으로 뚫려 있는 이 네 개의 큰문! 그 어느 문이든 통과만 하면 누구라도 부처님의 열반궁에 들어갈 수 있다. 문제는 '나'의 신심이요 '나'의 정성이다.
     
    무엇이든 못들어가리. 꾸준히 하다보면 문득 삼매(三昧)에 젖어들 날이 있고 그날이 오면 깨달음의 궁전 행복의 궁전 해탈의 궁전에 와 있음을 스스로 느낄 수 있게 된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