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콘신 스프링그린에 있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거주용 개인주택이자 작업실 탈리에신 하우스는 첫 결혼, 두 차례의 화재, 가족의 비극을 뒤로 한 채 원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지금도 남아 있다. Photo courtesy of the Frank Lloyd Wright Foundation
35살 되던 해인 1922년, 라이트는 드디어 정식 이혼을 하고 마리암 노엘Miriam Noel이라는 여성과 결혼하지만 여러 우여곡절 끝에 5년후에 이혼했다. 같은 해에 라이트는 세번째 부인인 올기바나 밀라노프Olgivana Milanoff와 결혼하면서 드디어 그가 항상 꿈에도 그리던 자연을 벗한 환경 속에서의 안정된 결혼생활을 꾸리게 되었다고 한다. 라이트는 탈리에신 하우스에서 살면서 건축 설계일과 후학 양성에 정열적인 힘을 쏟았고 시간이 나는대로 농사일도 하였는데, 그가 젊어서부터 착상해 온 ‚유기적’ 건축 철학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생활 환경을 누린 셈이 되었다. 그는 남서부의 아리조나州의 스코츠데일Scottsdale에다가 두번째 개인 주택인 탈리에신 웨스트Taliesin West를 지어 중서부의 혹독한 겨울 날씨로부터 피해 지내면서 강의와 저술 활동까지 활발하게 펼쳤다. 1930년대부터 꾸준히 해온 그의 강의와 집필 활동을 한 권의 책으로 모아 놓은 책 <건축의 미래The Future of Architecture>(1953년 간)는 라이트의 건축 철학을, 그가 직접 쓴 <자서전An Autobiography>(1932년 초판 발행)은 유명 연예인에 못지 않은 격동의 사생활과 작업 세계에 대한 이 건축가의 고백이 담겨있다.
자연 + 인간 = 유기적 건축
'…자연을 관찰하라, 자연을 사랑하라, 자연과 가까이하라. 자연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그의 후학들에게 한 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 원칙을 깊이 신봉하며 한평생 추구했었음에 불구하고 스스로는 그 어떤 특정의 개인 양식을 구축했다거나 고집하지 않았다고 자평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건축을 업으로 삼기 시작한 1890년대 이후부터 모더니즘 철학과 미학에 근거한 다양한 건축적 실험을 단행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건축에 ‚유기적organic’이라는 개념을 그의 건축 철학에 도입한 때는 20세기가 갓 출발한 때인 1908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기적 건축 철학은 그의 스승인 루이스 설리번Louis Sullivan이 모더니즘 건축을 일컬어 즐겨 사용했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이라는 그 유명한 슬로건에 라이트가 깊이 동경하며 추구하고자 했던 ‚자연nature’을 한데 버무린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모든 건축물은 모름지기 주변의 자연적 환경과 조화롭게 어울려야 하고, 건축물은 그 자체로 단지 부동하는 상자 같은 닫힌 공간이 아니라 실내가 외부 환경 사이의 공간이 서로 넘나드는 열려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기초 원리에 충실했다. 그 결과 라이트의 건축 세계를 좀 더 가까이 들어다보자면 뚜렷한 양식이 판독가능하지 않으면서도 매 작품들에마다 공동적으로 흐르는 형식적인 특징들을 추려낼 수가 있다. 예컨대, 그는 ‚유기적’ 공간 창조를 위해서 건축물 전체를 직사각형, 다이아몬드형, 또는 육각형 같은 여러 단위module의 규칙적인 모양의 기하학적 부분들로 구성 조합하는 것을 기본으로 여겼다. 또 공학도 출신 배경 덕택에 그가 매우 즐겨 사용했던 건축 구조적 요소로는 캔틸레버cantilever라는 긴 막대 기본형태의 구조물이 있는데 예컨대 발코니 처럼 방침대 구조물 없이 공중에 붕 뜬채 양 끝자리 만을 건축 본체에 매달리도록 한 것이 그것이다.
이같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적 특징들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된 경우는 일명 ‚프레리 하우스prairie house’ (들판의 집이라는 뜻) 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주거용 개인 주택들일 것이다.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미국 중서부의 광활하면서도 완만한 자연적 풍광에 잘 어울린다고 평가되는 그의 프레리 하우스 양식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한다면 1) 수평적인 선을 강조하고, 2) 대체로 1층을 유지하는 건물 본체와 나트막하고 깊에 드리워진 지붕을 채택했으며, 3) 실내 공간과 외부 자연 공간이 두절되지 않도록 넉넉하게 열린 공간을 지향해서 완만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중서부 지역의 지형을 아늑하게 감싸안은 듯한 감흥을 안겨준다는 것일테다. 그는 땅 속에 박혀 있는 지하실 공간도 매우 실허했기 때문에 1894년 독립 건축 사무소를 차린 이후로 수수받아 설계된 개인 주택들은 대부분 지하실이 없다. 집건물이란 땅 속에 박혀 있을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땅 위에 서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믿었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신념이 잘 반영된 것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주거용 주택의 실내 공간 또한 이전까지 미국에서 널리 일반화되어 있던 실내 공간의 관습에서 과감하게 탈피했다. 예컨대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의 주거용 집 실내는 거실, 침실, 주방, 식당 등 기능별로 두터운 벽으로 뚜렷하게 구분된 방들로 구성된 영국 빅토리아 시대풍의 실내장식이 지배적이었다. 라이트는 그같은 폐쇄형 공간 뿐만 아니라 평균적인 인간의 신체 규모에 부응하는 아담한 ‚휴먼 스케일human scale’의 열렬한 옹호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예컨대 개인의 주문으로1901년에 일리노이州 하이랜드 파크에 지은 워드 윌리츠 하우스는 집안의 벽들을 거의 제거하고 그 대신에 거실 중간에 벽난로를 설치하여 입구와 거실 공간을 자연스럽게 분리시켰다. 그는 공간이 한정된 개인 주택을 설계할 경우, 공간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 입구를 보통 남성의 평균 신장을 넘지 않는 나트막한 입구와 지붕으로 설계한 다음 일단 실내에 들어서면 집안의 1층과 반2층 공간 전체로 시야가 확 트이도록 설계함으로써 기대이상의 공간확대 효과를 주는데도 명수였다.
그가 주문받아 설계한 프레리 수많은 하우스 프로젝트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백미白尾로 꼽히는 예는 시카고 사우스사이드에 위치한 로비 하우스Robie house로 꼽힌다. 1906년에 착공하여 1909년에 완공된 이 개인 주택은 긴 장방형 건평 위에 3층으로 올린 개인 주택이다. 캔틸레버 구조를 활용해 얹어진 지붕의 길이는 무려 6.4미터에 이르며 그 지붕 밑에는 같은 길이로 펼쳐진 서향 베란다가 설치되어 잇다. 3층 짜리 집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2층집 높이도 채 안될 만큼 나트막한 천정을 지니고 있지만 집 곳곳을 돌려가며 설치된 대형 유리창과 출입구, 얕게 드리워진 지붕 구조로 덕분에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태양광을 최대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연륜이 보다 무르익은 30여년 후, 미국 동부 펜실바니아州의 한 갑부 상점주인인 에드가와 릴리앤 카우프만 부부의 의뢰로 1939년에 베어 런Bear Run에 지어진 폴링워터Fallingwater는 폭포수 위를 가로지르며 주변의 사암 위해 콘크리트 캔틸레버 공법을 사용해 지어진 드라마틱하기로 유명한 대표적인 개인 주거용 건축물이다. 벌써 수년째 현재까지 구미권 언론들은 본래부터 아슬아슬하게 지어져서 콘크리트 균열 및 누수 등 틈틈히 구조적 결함을 보여온 이 폴링워터 하우스가 아니나 다를까 곧 붕괴될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보도해 오고 있다. 쏟아지는 폭포수 위에 걸터앉은 집을 짓는다는 착상 자체부터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사자같은 자존심의 표현이었다고 평가되어 온 데다가 그같은 자연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자연 풍광과 건축, 외부와 실내, 원대한 컨셉과 실용적인 생활이 한데 조화된 집의 구현체로서의 폴링워터는 미국인에게는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버금가는 미국인의 꿈, 신기술, 자유, 아름다움의 집약결정체이기도 했다. 지금은 미국 웨스턴 펜실바니아 보존소가 관리하고 있는 이 폴링워터 하우스의 보존 및 수리 예산액은 15만5천 달러 가량 된다고 한다.
그는 실제로 돈많은 개임 갑부들이나 사업가들 클라이언트들을 상대로 주문받아 주택 설계를 했다. 라이트가 요구하는 설계비 외에도 값비싼 건축 자재 구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은 돈많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생전 건축가로서 자신의 꿈은 ‚유소니안 하우스Usonian House’를 짖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인의 집’ (US + -onian, 라이트는 미국을 유소니언Usonian라는 별명으로 불렀다)이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이 조어가 뜻하는 바는 평생 미국인들을 위한 저렴하고 민주적인 집을 지어 보급하고 싶다는 그의 한평생 꿈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유소니안 하우스로 제시했던 주택 디자인은 주로 ‚ㄴ’자 모양을 한 평면 구도 위에 콘크리스, 벽돌, 목재 합판, 창문용 유리 소재를 채용한 단순한 모양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흔히 시끌벅적한 거리에 위치해 있는 이들 집들에 조용한 침실 공간을 제공하기 위하여 ‚ㄴ’자 평면도를 고집했고, 시공의 편의를 고려해서 표준화된 정사각형 콘크리트 벽, 상하수도 파이프, 난방용 파이프, 목재 실내벽과 뒷뜰로 난 유리창을 강조했다. 라이트의 이같은 유소니안 하우스들은 지금도 위스콘신州의 매디슨市와 캘리포니아 곳곳에서 50여군데 남아있다.
낭만적인 정신과 혁신과 합리적인 이성의 거장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70년에 걸친 건축가 일평생에 걸쳐 설파한 ‚유기적 건축’의 이상이란 인간의 지적 정신 세계를 통해서 걸러진 자연과 조화롭게 결합시킬줄 아는 건축을 이룩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이상주의적이었다. 클라이언트의 키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건축 칫수를 자신의 몸칫수에 기준을 삼아 설계한 그만의 특유의 ‚휴먼스케일’에 대한 신념과 목재와 같은 자연적인 재료 외에도 건축 신소재와 건축 기술에 대한 강한 옹호 태도는 인본중심적인 르네상스적 예술 정신과 모더니즘적 신사고의 결합이라해도 좋을 것이며 그는 바로 그같은 정신에서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찾았다. 클라이언트가 저급 취향의 집을 원할 때 어떻게 타협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프랭크 로이드는 이렇게 단언했다. „그의 취미가 아무리 모자랄지라도 유기적 이상에 기초하여 설계하면 반드시 탁월한 취향의 건축이 탄생하게 되어있다.“ 진정한 건축미란 주어진 공간과 특정 순간이 빚어 내는 것이지 보는자 개인의 취향으로 결정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글/박진아 출처: 공간사랑 지 2005년 6월호
[낙수장 Falling Water] - Kaufman House의 외관 | |
1910년 이후부터 침묵의 시기에 있던 라이트는 낙수장을 통해 자신이 전개해왔던 모든 것을 표현함으로써 제2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낙수장은 극적인 자연환경에 동화와 뛰어난 구조의 일치, 공간과 입체조형의 명쾌한 해결책을 보여주고있다.
로비주택과 유니티 교회에서 절정에 달했던 그의 초기 작품들, 마야의 피라미드 모양의 매스를 활용한 자신의 콘크리트 블록 주택, 철근콘크리트의 구조적인 연속성, 신조형주의적인 형태 금속과 유리로 처리된 기계미가 풍기는 스크린 같은 벽, 낭만적 자연주의의 자연에 대한 숭배 낭만적 고전주의의 명쾌한 기하학적 형태등 이 모든 것들이 이 건물에서 반영되고융합되어 있다.
Ⅰ. 형 태
1st Floor Plan
- 유기적으로 해석된 개방공간이 주된 형태 요소
·자유로이 유동하는 개방공간을 정착시키기 위한 수직요소로의 뼈대사용
·개방된 자연과 접촉하고 있는 각 공간들의 기능적 요구사항으로 형태 결정
→ 침실에는 테라스가 있음
·서로 직교하면서 짧게 전개되는 벽체들에 의한 공간구성
·벽난로와 부엌으로 구성된 수직의 블록에 의해 개방 평면 정착
- 신조형주의의 공간적 구성 개념의 영향
·기능적 및 기술적인 요구사항과 신조형주의의 영향으로 조형적인 형태로 통합
·평면의 윤곽은 더 스틸파의 반 도스부르크의 형상과 유사
- 자연의 환경과 유기적을 결합
2nd Floor Plan
·벽난로 앞쪽의 거실에는 자연석이 노출
·자유로이 부유하는 발코니는 자연의 테라스 반복
·자연의 힘과 대조
→ 발코니의 수평적 요소와 벽난로의 수직적 요소에 의한 긴장감과
질서잡힌 형태는 낙하하는 자연의 힘과 대조를 이룸
Ⅱ. 의 미
- 외부와 내부가 일체화된 공간 형성
발코니
·입체구성으로 종과 횡의 매스가 서로 물리고 물리듯 구성
- 대지의 일부로 존재
거실
·자연의 암석을 만들고 폭포가 있는 물위에 띄워 대지와 합체 시도
- 재료의 본질의 추구와 추상화와 구조기술의 가능성
·캔틸레버로 과감하게 처리된 발코니 사용
·유기적 건축을 통한 재료의 본질 추구
『낙수장에 관하여..』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1867 -미국 위스콘신주(州) 리치랜드센터에서 출생
1885 -15세때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어 위스콘신대학을 고학으로 졸업
1887 -근대건축의 선구자인 L.H.설리번의 설계사무소에서 일함.
1893 -시카고에 자신의 사무실 개설. 만국박람회를 통하여 일본과 동양의 건축에 관심을 갖기작 함.
1893~1911 -유기적 건축이론에 바탕을 둔‘ 대 초원 양식(prairie style) ` 시리즈를 통해 주택중심의 많은 걸작을 선보임. 윈슬로주택(1893), 하트레이저택(1902), 마틴저택(1904), 쿤레이저택(1908), 로비저택(1909), 탈레신의자택(1911년이후)
1904~1910 -주택 이외에도 라킨사(社)빌딩(1904),유니테리언교회(1906) 등이 있음. 1910년 베를린에서 작품집 출간
1911~1935 -침묵의 시기. 해외도피 및 은둔생활로 작품활동이 전 시대에 비해 거의 없었다. 미드웨이가든, 일본의 제국호텔, 탈리아신이스트 등...
1936~39 -1936년 '낙수장(Falling water)’라고 명명된 카프만저택, 1939년 존슨왁스본사 건축물을 통해, 당시 세계적으로 파급되던 국제건축양식(international style)을 받아들이면서 제2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1938~39 -이후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1938년부터의 탈레신 웨스트주택건설을 시작으로, 제2제이콥스저택(1948), D.라이트저택(1952), 프라이스타워(1956), 베스쇼롬유 대교회(1955), 마천루계획안
1959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1959)을 완성하기 직전 애리조나주(州)피닉스에서 사망
@낙수장의 신념
1935년에 라이트가 세운 펜실베니아주 베어런에 있는 낙수장(카우프만 주택)은 미국에서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주택이다. 피츠버그 백화점 사장을 위해 세운 낙수장은 라이트가 만든 것 들 중 가장 시적인 건축으로서 라이트의 로맨틱한 신념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것이다. 자연에 바칠 신전을 만들기 위해 모든 고대적인 요소들이 이 주택에서 활용되고 있다. 바위의 벼랑 위에 집에 세워져 있으며 바위 중의 하나를 거실 바닥으로 하여 난로의 바닥을 만들고 있다. 난로가 집의 중심에 있고 폭포는 밑에 있다. 그리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대담하게 커다란 캔틸레버 슬래브를 연장시키고 있다.
@낙수장의 재료
낙수장에서 사용된 주요 재료는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슬래브로, 천장 역할과 바닥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다. 그 다음은 돌인데, 내외부의 석벽과 바닥은 시멘트와 대조적인 조화를 이루고, 마지막으로 유리막이 부여 되었는데, 이 것은 연속된 유리막 가운데 있는 고정 유리창과 결합되어 있다. 이 유리 커튼 월이 낙수장의 세번째 주요 요소이다. 낙수장이 지형의 경사에 따라 한 층씩 뒤로 물러나 앉아 있듯이 유리막 또한 능수능란하게 다루어져 있고, 거실 주변의 유리막은 내부 공간의 구석 마다에 있는 기둥이 없이 3면이 연속해서 펼쳐져 있다
@낙수장의 재료와 형태
암벽 위에 지어진 이 부분(-건물의 수직적지지 요소들처럼)들은 自然石으로 만들어졌다. 이 부분들과 인접하여 수평적 레벨들이 직각 형태로 겹쳐지고 있으며, 부드러운 콘크리트로 된 평행 부분의 표면은 자연 속으로 확장되어 가며, 흡사 작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같이 보인다. 상호 맞물린 형태의 공간적 침투는 생동감 있고 복합적인 유회로 발전되고 있으며, 이러한 유회는 보강 콘크리트의 이용에 있어서 혁신적인 가능성들을 제공했다.
켄틸레버를 깔아 주어 passer를 받아들이려는 형태의 작업을 취하며 이러한 작업은 일차적인 작업인 "평면은 해결" 이라는 수단에서 먼저 취한 상태에서의 결과를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평면의 해결이 있은 후 가장 중요한 가로막힌 벽으로의 구획이 아니며 , 명확한 특징으로 이루어지는 구조체는 그 경계선의 명확한 벽이 아닌 구조부 이외의 네모서리엔 켄틸레버를 만들어 자유로운 개방적 처리가 이루어지도록 구성하여 외부와 내부의 서로 상응할 수 있는 경계를 애매하게 처리하는 면에 길게 늘어지는 길이에 상응하여 떨어지는 지역 의 경계를 이용한 기술은 진입의 방향성을 암시하는 동시에 연장되는 방향의 확장하려는 듯한 밖으로의 연장되는 힘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낙수장의 구조
낙수장이 지형의 경사에 따라 한 층씩 뒤로 물러나 앉아 있듯이 유리막 또한 능수능란하게 다루어져 있고, 거실 주변의 유리막은 내부 공간의 구석 마다에 있는 기둥이 없이 3면이 연속해서 펼쳐져 있다. 수평 콘크리트의 기하학적 구성과 수직의 돌(벽과 난로)은 서로 대립되어 있다. 내부 공간은 발코니 공간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폭포 위의 작은 바위 위에 놓여져 있는 커다란 콘크리트 슬래브는 드라마틱한 공간을 연출한다.
낙수장은 메인 주거동과 손님 주거동(차고포함)으로 분리되어 있다. 손님 주거동은 메인 주거동 보다 높은 곳에 배치되어 있다. 평면 형태는 십자형 평면을 채택하고 있다. 그라운드 평면에는 식당, 거실, 부엌, 2층 평면에는 주침실, 손님방, 테라스 등이 있고 2층에는 서재, 갤러리 등이 있다.
@낙수장의 느낌
낙수장의 물소리, 테라스를 통한 내 외부 공간의 유기적인 흐름, 벽난로의 불로 통합된 자연적인 요소는 은신처로서의 느낌을 보다 강하게 하고 있다. 철재 창문은 외부 경관과 태양을 실내내부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며 모든 디자인 요소는 거주자의 시점으로 맞춰져 있다. 이러한 원칙에 의해 낙수장은 인간의 편안함과 거주자의 사용을 최대로 고려하고 있다. 라이트는 건축가의 조형적인 욕심에 의해 사용자가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주택은 주택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