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問喪)은 부고(訃告)나 부음(訃音)을 접한 고인(故人)과의 아는 사이이거나 또는 상주와 두터운 인간관계 및 정리가 있는 분이나 복인(腹人)과 가까운 사이에 있는 분들이 추모의 정으로 상주에게 따뜻한 위문과 위로의 뜻을 전하는 행위이다.
복인(腹人)이란 8촌이내의 직계를 이른다. 보통 모친상을 내간상(內艱喪)이라 하고 부친상을 외간상(外艱喪)이라고 하는데 간(艱)은 부모의 상(喪)에 쓰는 간의 뜻이다.
외간상(外艱喪)이나 내간상(內艱喪)이나 내외(內外)의 예(禮)에 따라 행한다.
상주(喪主)와 아주 친한 사이 일지라도 모친을 살아있을 때 뵈온 적이 없을 때는 상주에게 문상만 하고 위로와 위문의 뜻을 전하는 게 원칙이나 요즘은 옛날처럼 내외(內外)가 분명치 않으므로 꼭 그 원칙을 지킬 필요가 없으나 특별한 경우가 생길 시(時)에는 이를 아는 것이 좋다.
상가에 문상을 갔을 경우 먼저 빈소에 있는 영좌에 재배하고 상주를 조문하는 것이다. 상주는 빈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부복하여 근신(謹愼)하고 문상객이 오면 곡(哭)을 하여 맞이해야 한다.
문상객이 문상하고 나갈 때는 상주(喪主)는 따라 나가서 전송하지 말아야 한다. 상주는 고인이 있는 빈소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다. 문상객은 이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문상 온 사람이 향을 피우고 술을 따르는 일이 있는데 이는 상주만이 하는 것이다. 조객(弔客)이 고인과의 정리와 사주와의 친분을 생각해서 요즘은 많이 하고 있으나 원래의 의미는 상주만이 할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생각과 상주를 위로하는 마음에서 엄숙하고 절제된 행동으로 예를 올림은 굳이 막을 필요가 없어 보인다.
문상이 끝난 후 상가 집에서는 문상객에게 간단한 술과 안주를 대접한다. 이는 성복제가 끝난 후에 해야 한다. 문상객을 접대하는 일은 상주가 하지 않고 호상이 맡아서 접대하며 상주가 문상객과 술과 안주를 나누는 일은 삼가야 한다. 안상주는 주방에서 일을 하는게 아니나 현실상 주방의 사정을 잘 모르는 경우나 일손이 바쁠 경우 도와주는 것은 무방하다.
문상(問喪)은 조문(弔問), 조상(弔喪)이라고 하는데 상가에 부고를 접했거나 알게 된 친지나 이웃, 고인의 친우나 상주의 친우들이 방문하여 상주에게 위로와 위문하는 행위를 말한다. 보통 “어디 가십니까?” 하고 물으면 “상문(喪問) 간다” 라고 하는데 이는 자칫 상문(喪門)으로 오해될 어법으로 이해되기 쉬운 말이다.
상문(喪門)이란 초상집에서 그 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부정을 타지 아니 하도록 장님 집에 가서 경을 읽는 일을 말하므로 자칫 결례의 말이 될 수도 있다.
상문(喪問이란 말보다 문상(問喪)이나 조문(弔問), 조상(弔喪)이라고 쓰면 좋겠다.
문상은 상주의 슬픔을 위로하고 위문함이지, 망자의 공적이나 덕을 기억하여 애통하고 아쉬워함이 우선은 아니다. 문상은 망자, 상주, 복인과 잘 아는 분이 상주나 복인이 슬퍼하고 안타까운 것을 함께 느끼고 상주에게 달려가 위문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화된 현대에는 문상(問喪)의 전통적 의미가 종교적인 이유와 교리로 달라져 있다. 전통적 문상례(問喪禮)와 혼합된 종교적 문상(問喪)이 어울어져 있다.
기도와 찬송, 염불과 함께 전통적 유교 문상(問喪)이 행하여진다. 죽어서 하느님 곁으로 가도록 기원하는 기독교적 문상(問喪)과 망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불교적 문상(問喪)은 문상(問喪)의 의미는 같으나 형식은 달리 또는 혼합의 형태를 취한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유교적 요소가 포함된 의식이라고 생각하는 망자에게는 혼백이 존재하고 영좌(靈座)를 차려놓고 음식을 진설하고 곡을 하며 향촉을 밝히고 술을 따르는 것이 신(神)의 의미는 조상에 대한 혼백이지 종교적 절대자에 대한 신봉은 아니라고 하겠다.
상주가 망자의 혼백을 모시고 기리는 참된 뜻은 부모의 유덕(遺德)을 기리고 이를 따르겠다는 효심의 표현이지 부활과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종교적 행위는 아니다.
유교에서는 종교적 사상을 내세구제에 두지는 않았으므로 망자의 종교적 형식이 애매하게 생각되나 위로는 선현의 덕을 따르고 아래로는 자손들을 올바르게 가르쳐 살게하는 가족적 연결고리 속에서 유교적 신(神)의 개념을 느낄 때 유교식은 실천적 윤리로 해석함이 좋을 것 같다.
우리 생활에 유교는 효와 충을 바탕으로 한 생활윤리이다. 오늘날 문상의 형태는 유교적 사상이 근본 뿌리를 이루고 있다. 올바른 문상예법을 익혀 앎으로써 문상이 상주의 위로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문상객 본인의 가족과 이웃에도 함께 실천된 올바른 효의 도덕을 가르치는 소중한 교육적인 측면도 있다. 비록 전통적 유교의식과 정신이 다종교화, 무속적, 습관적인 차이와 갈등이 존재함에도 본래의 참뜻을 바로 알아 자기 자신을 깨우쳐 비추고 이를 자손에게 몸으로 전해 주어야 할 의무를 가진다.
조상(弔喪)은 죽은 사람에게 직접 조의를 표한다는 뜻으로 남자가 죽은 상(喪)에 인사하는 것이다. 문상(問喪)은 여자가 죽은 상(喪)에 대해 상주에게 위문하는 인사이다. 부음을 받으면 조상(弔喪)도 가고 문상(問喪)도 하여 슬픔을 표하므로 이를 합쳐 조문(弔問)이라고도 한다.
조문객이 상가에 도착하면 호상소에 들러 조객록(조 위록, 방명록)에 주소, 성명을 기록하고 분향소로 가서 조문한다. 조문객이 도착하면 상주는 일어서서 남자는 오른 손이 위로, 여자는 왼 손이 위로하여 공수(拱手)하고 곡(哭)을 한다.
곡(哭)은 상주는 애고애고 하고 조객(弔客)은 어이어이 한다. 애고애고는 애고자(哀孤子)라는 말이고 어이어이는 어의(於意)라는 뜻으로 맞습니다 라는 슬픔을 나눈다는 말이다. 공수(拱手)의 예는 사람이 주어서 약 100일만에 지내는 졸곡제(卒哭祭)까지 한다.
조문객은 분향소에서 홀수의 향을 사르고 상주와 같은 공수를 하고 어이어이의 곡(哭)을 하거나 잠시 침묵이나 묵념 후 죽은 이를 추모하는 뜻에서 두 번 절을 한다. 죽은 이가 아래 사람이면 절을 하지 않는다. 곡이불배(哭以不配)
상가집에 문상가서 하는 예법은 영좌가 모셔진 빈소에 가서 빈소를 보고 곡을 하고 재배한다. 그 후 상주와 한 번 절을 하여 위로와 위문을 한다. 문상객과 상주는 대등한 입장에서 위문과 위로를 주고받는 위치이므로 상주가 어리다고 말을 노 놓는다든지 하는 결례를 해서는 안된다. 빈소는 상주가 모시는 곳이지, 사주와 복인 이외의 사람은 빈소에 관여해서는 안되며 빈소를 출입하는 사람도 상주만이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따로 빈소와 문상객을 맞는 장소의 구분이 분명치 못하고 같이 함께 공간을 둠으로써 이런 취지를 알고 예를 행함이 좋다.
일반 가정집에서 향을 피우거나 술을 부어 놓은 것은 상주만이 할 수 있으나 정리(精理)의 정신이 지나쳐서 요즘 문상객은 누구나 그렇게 한다. 그러나 상주의 마음을 분명히 헤아려야 할 것이다.
국민장이나 국립묘지에서 올리는 제례는 주제자(主祭者)가 곧 국민이다. 그러므로 국민이 상주이므로 분향과 전작(奠酌)을 행함은 바른 예법(禮法)이다.
현대생활은 부모와 자식이 따로 사는 가정이 많고 생활환경이 각각 달라서 다른 곳에서 생활하는 핵가족이 일반화되어 있다. 죽음이란 누구나 오나 상주된 입장에서는 많은 경험이 이루어지지 않고 또 당황하여 모든 것을 빠른 시간 안에 혼자서 챙겨 예를 다하기가 어렵다. 그럴 경우 유복지친(有服之親)인 집안의 도움을 받기 어렵다. 이웃, 친구, 계원들이 먼저 와서 도와주며 거들어 준다. 그것도 어려울 경우 장의사가 오거나 종교인인 경우 종교단체에서 와서 상사(喪事)를 의논한다.
복잡하고 개인주의적인 도시에서 살면서 상사(喪事)를 당할 경우 친구나 신앙생활을 하는 분이 와서 밤샘도 하고 상주를 위로하여 뒷처리를 하거나 심부름을 하는 것은 정말 고맙고 좋은 풍습이나 시간이 지나 연락을 받고 복인(腹人)들이 도착하여 상사(喪事)가 진척되면 다른 분들은 물러서 주고 그들이 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무조건 돕는다는 생각이 지나쳐 상주에게 사사건건 간섭의 기분을 주는 것은 크나큰 실례가 된다.
상가 집에 친구들이 와서 밤샘을 하여 상주를 위문하는 것도 좋은 일이나 과음과 놀음으로 상주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거나 싸움이나 욕설로 상가의 분위기를 시장터로 만드는 것은 예(禮)에 크게 어긋남을 명심하자.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일에는 축하하고 흉사에는 위로함이 교류간(交流間)에는 지켜야 할 중요한 예법이다. 이를 지키지 못함은 교류(交流)의 단절로 간주된다.
경조상간(慶弔相間)에 경사(慶事)는 초청의 의미이고 흉사에는 알린다는 의미이다. 경사(驚事)의 초청에 특별한 일로 함께 하지 못함은 꼭 허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흉사에는 꼭 찾아뵙고 문상함이 인간의 참된 예법이다. 경사(慶事)나 흉사는 그 집안이 남에게 보여지는 행사이므로 그 예법이나 범절, 절차가 어긋남이 없이 정성되이 하여야 한다.
국가적 경사나 흉사에는 국민 각자가 주인이므로 모두 함께 일을 처리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모아야 한다. 현대생활을 하면서 과거의 예법이 많이 변하여 없어지거나 단순화되었다고 하여 전통적 예법은 구태라 생각하여 무조건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자본화, 민주화, 개인화 되어 있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우리의 고유한 전통의 아름다운 예법을 몰가치 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 정신의 원리를 오늘날에 맞도록 적용하는 바람직한 지혜가 필요하다.
부모를 둔 자식은 조상으로부터 이어온 정신을 현대라는 이름으로 버리지 말고 그 다음 자손을 위해 정신을 계승 발전시킴이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