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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防蹈海 無露圭角(방도해 무노규각)
    카테고리 없음 2012. 1. 18. 14:48

     

    防蹈海 無露圭角(방도해 무노규각)

     

    변을 당하지 않으려면 언행에 모가 나지 말아야 한다.

    暴君(폭군)을 主君(주군)으로 모셔야 하는 臣下(신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반드시 暴君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뜻과 相衝(상충)되는 上司(상사)를 둔 사원도 동일한 경우다. 어떻게 해야 올바른 處身(처신)이 될 것인가.
     
    최근 某 대기업의 總帥(총수)가 가장 잘나가는 사업 분야의 사장들을 집합시켜 놓고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호통을 친 일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떠날 때 떠나라」는 것이다. 이 말은 사원들에게는 靑天霹靂(청천벽력) 같은 말이 아닐 수 없다. 청춘을 바쳐 회사를 위해 일하고 목숨을 바칠 각오로 근무했는데 떠날 때 떠나라니.
     
    하지만 그 속뜻을 잘 새겨야 한다. 「한 회사를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는 생각 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매너리즘이 배어 있지 않나 돌이켜 봐야 한다. 그 總帥는 간부들이 몇 년간 계속된 好況(호황)을 後光(후광) 삼아 자기 노력과 능력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警告(경고)를 한 것이다.
     
    나그네처럼 조금 유리한 연봉에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것도 꼴불견이지만, 끝까지 떠나지 않고 固守(고수)하겠다는 쪽도 지조와 절개, 충성으로 포장된 無事安逸(무사안일)이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한다.
     
    宋(송)나라 杜衍(두연)의 일화는 忠節(충절)이 무모할 수 있다는 교훈을 던진다.
     
    宋나라 仁宗(인종)은 韓琦(한기), 范仲淹(범중엄), 歐陽修(구양수), 司馬光(사마광), 張載(장재), 程顥(정호) 등과 같은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여 國政(국정)을 이끌었다.
     
    그는 많은 업적을 쌓았지만, 유능한 신하들 간에 名論(명론)과 卓說(탁설)로 잦은 충돌을 일으켜 조정은 늘 시끄러웠다. 이들은 黨派(당파)를 이루어 兩黨(양당)이 서로 교대로 정권을 잡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20년 동안 내각이 17회나 갈렸으니, 세상에서는 이를 두고 「慶曆(경력)의 黨議(당의)」라 했다.
     
    신하들 중에 杜衍이란 강직한 재상이 있었다. 性品(성품)이 절개가 곧고 강직하여 임금에게 直言(직언)을 서슴지 않을 정도였다. 당시 「內降(내강)」이라는 임금의 관습이 있었다. 내강(內降)이란 「임금이 詔書(조서)를 내릴 때, 신하들과 상의하지 않고 임금 뜻대로 명을 내리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강직한 두연은 이 관습이 올바른 정치의 길을 막는 행위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임금의 조서(詔書)가 내려오면 수십 장이 쌓이도록 放置(방치)했다가, 말없이 되돌려 보냈다. 드디어 반대파의 신하들은 이를 보고 임금의 교지를 왜곡하는 행위라고 맹비난을 하기에 이르렀다.
     
    仁宗 또한 내심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였는데, 마침 두연(杜衍)의 사위인 소순흠이 관리자로서 공금을 유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國庫(국고)로 관청의 손님을 초대해 기녀를 불러 酒宴(주연)을 베푼 사건이었다. 두연(杜衍)의 반대파였던 왕공진이 소순흠을 취조하여 여러 명이 연루된 사실을 알아내 모두 하옥시켰다. 두연(杜衍)은 이 사건으로 재상에 오른 지 70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숙적을 일거에 제거한 왕공진은,
    『나는 한 그물로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잡았다』며 기뻐했다. 여기에서 「一網打盡(일망타진)」이란 말이 유래되었다.
     
    임금이 暴君이 아니었고 두연(杜衍)이 직접 연루되지 않은 사건이었지만 평소에 모난 행동으로 말미암아 임금과 반대파에 미움을 산 결과였다. 충절이 평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이다.
     
    반면 올바르게 忠言(충언)을 하면서 현명하게 처신하여 禍(화)를 면한 箕子(기자)라는 인물이 있다.
     
     
     
    미친 척해서 목숨 건진 箕子
     
    고대 중국 은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紂王(주왕)은 원래 智勇(지용)을 겸비한 賢主(현주)였다. 그러나 그가 정복한 북방 오랑캐의 有蘇氏國(유소씨국)에서 공물로 보내온 「달기」라는 희대의 妖女毒婦(요녀독부)를 맞이하면서 역사의 暴君으로 치닫게 된다.
     
    신하들은 주왕(紂王)의 暴虐(포학)을 諫(간)하고자 여러 방도로 의논을 했다. 그때 신하 중에 기자(箕子)라는 현명한 신하가 있었다.
     
      어느 날, 紂王이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게 했다. 
      기자(箕子)는 그것을 극구 말렸다.
      『임금님, 상아로 젓가락을 만드는 일을 그만두소서!』 
      그러자 주왕(紂王)은 성을 냈다.
      『그래, 임금이 이까짓 젓가락 하나를 못 만든단 말인가?』
     
    주왕(紂王)이 듣지 않자 기자(箕子)는 주왕(紂王)을 떠날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신하들은
    「그까짓 젓가락 하나 때문에 벼슬을 버리려 하느냐」며 수군댔다. 그러자 기자(箕子)는 이렇게 말했다.
     
    그까짓 젓가락 하나가 아닙니다. 상아 젓가락이 생기면 거기에 맞도록 옥그릇으로 바꿀 것이며, 옥그릇에 밥을 먹으면 거기에 어울리도록 음식을 山海珍味(산해진미)로 바꿀 것입니다.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먹으면 옷이 초라해 보여 비단옷으로 바꿀 것이고, 비단옷을 입으면 거기에 걸맞은 금은보화로 치장을 할 것입니다.
     
    음식과 옷을 바꾸면 궁전을 크고 화려하게 다시 지을 것이고, 궁전을 다시 지으면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임금 한 사람의 사치는 마침내 온 나라를 망하게 하고 말 것입니다』
     
    과연 주왕(紂王)은 달기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막대한 國庫를 기울여 시설한 酒池肉林(주지육림) 속에서 晝夜長川(주야장천) 飮酒暴樂(음주폭락)으로 나날을 보냈다.
     
    충신들은 諫言(간언)을 했다. 그러나 처형당하거나 유폐되었다. 忠諫者(충간자)를 처형하고 요녀 달기가 웃는 모양을 보기 위해 극악한
    炮烙之刑(포락지형)을 일삼았다.
     
    어느 날 주왕(紂王)이 주색에 빠져 놀다가 신하들에게 「오늘 날짜가 며칠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주왕(紂王)과 같이 유희에 빠졌던 신하들은 날짜를 모르고 있었다. 이때 주왕(紂王)이 기자(箕子)를 불러 날짜를 물었다.
     
    기자(箕子)는 당연히 날짜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천하의 주인이면서 날짜를 모르고 주위의 고위관직 신하들까지 모른다고 하는데 만약 내가 아는 척하면 그들의 시샘을 사서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많은 충신들이 폭정에 굴하지 않고 간언을 하다가 紂王의 노여움을 사서 비참하게 죽거나 이웃 나라로 망명했다. 기자(箕子)는 아예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저잣거리로 돌아다녔다.
     
    怨聲(원성)이 하늘에 닿아 백성과 제후들로부터 離叛(이반)당한 紂王은 결국 周나라의 武王(무왕)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모난 언행을 삼가야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가 난 언행을 삼가고, 언제든 떠날 각오로 일한다면 無事安逸(무사안일)이나 떠돌이 폐해를 모두 피할 수 있을 것이다.
     
    政治(정치)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옛날과 크게 달라진 것이 있다. 지금은 바야흐로 百姓(백성)의 시대다.
     
    백성이 임금을 택하는 시대다.

    임금이 獨斷(독단)으로 신하를 호령하고 백성에 군림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현대는 오히려 君主가 백성의 눈치를 잘 살펴야 나라가 평안한 시대인 것이다.

    백성의 처지와 마음을 잘 이해하는 모가 나지 않은 성품의 君主가 현대에는 더 적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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