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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념이 문이다, 무언이 문이다, 무심이 길이다.
    ◑解憂所 2008. 11. 9. 11:54

    다른 장미를 끌어들일 때 마음은 혼란에 빠진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많은 것을 떠맡고 그것이 장애가 된다, 이 장미는 그대에게
    다가갈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 장미에는 어떤 참된 것이 있어 그것
    은 그대를 꿰뚫을 수도 있었다.

    그 향기가 그대를 관통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 장미는 그대의
    가슴을 두드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대는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대가 돌아올 무렵에는 그 장미는 이미
    이곳에는 없다, 왜냐하면 장미는 기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색이 바랬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메시지를 갖고 있다, 알 수 없는 뭔가를 갖고 온 것
    이다, 하지만 그 알 수 없는 것은 깨지기 쉬워 영구히 갖고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저쪽에서 전해지는 무엇인가를 가져오고 있다.

    모든 장미가 그것을 가져오고 있다, 매일 아침 그것은 찾아와서
    그대의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그대들은 사색가다, 미지 그 자체인
    무엇인가가 ‘신성한 것’이, 시간을 초월한 무엇인가가 장미를 통해서
    시간에 스며든다, 하지만 그대가 생각하면 놓친다, 왜냐하면 그대가
    생각하면 옆길로 벗어나 어느 새 멀리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장미에 대해서 생각하고 시인은 장미를 느낀다, 만약 결
    정을 해야만 한다면 반드시 시인 쪽에 서도록 하라, 시인은 철학자
    보다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 하지만 신비주의자는 생각도 하지
    않고 느끼지도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장미의 현존 속에 머물 뿐이다.

    왜냐하면 느끼는 일도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것만큼
    멀리까지 가지는 않지만 느끼는 일도 멀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느
    끼는 일 역시 어떤 미묘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신비주의자는 장미의 현존 속에 그저 머문다, 행동도 하지 않고 생
    각하지도 않고 느끼지도 않는다, 가슴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그는
    오로지 장미와 함께 있다.

    이것을 힌두교도는 사트상이라고 부른다, 언제든 그곳에 인간의
    장미가 있을 때 한 붓다나 한 스승이 있을 때 인간은 오로지 그 사람
    곁에 머문다, 그 사람과 함께 존재한다, 오로지 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다, 이것을 힌두교도는 사트상이라고 부른다, 진리 가까이 있다는
    뜻이다, 사트상이라는 말은 진리의 속에 있음을 뜻한다.

    장미가 있으면 그것과 함께 있도록 하라, 미묘한 것이든 거친 것이
    든 어떤 행동도 하지 말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거친 행동이다, 느
    끼는 것은 미묘한 행동이다.

    하지만 그대도 알고 있듯이 느끼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바뀔 수 있
    다, 생각하는 것은 느끼기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생각과 느낌은 자리
    바꿈이 가능하다, 생각과 느낌은 서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느끼는 것은 생각의 중간단계다, 느끼는 것은 막 싹을 낸 씨앗이고
    생각하는 것은 싹이 자란 나무다, 하지만 그 과정은 다른 게 아니다,
    가슴과 머리는 그렇게 멀리 떨어진 게 아니다, 세상만사는 가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대들이 그것을 알아차리기 전에 그것은 금방 머리
    에 당도한다.

    그저 함께 있도록 하라 - 그러면 모든 게 드러난다, 그러면 모든
    문이 열린다, 어떤 질문도 없고 어떤 대답도 없다, 오로지 진실과 하
    나가 되어 있을 뿐이다, 생각하면 멀어진다, 느끼면 그렇게 많이 멀어
    지지는 않지만 그런데도 분리되어 있다, 다가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분리되어 있는 상태다.

    생각하지도 말고 느끼지도 말고 오로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
    러면 갑자기 그곳에 자신은 없다, 그곳에 세상은 없다, ‘하나인 것’
    이, 브라흐마가 나타난다, 자신과 세상은 하나가 되어 있다, 무한한
    것과 형상을 이루지 않은 것이 그곳에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진리다.

    진리란 철학적인 결론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실존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사고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다, 그것은 원래 그대들의 모든 존
    재에 갖춰져 있는 것 - 인간은 그것과 함께 있는 것이다.

    한 방울의 물이 바다에 떨어질 때에는 머리와 떨어지려고 하거나 가
    슴과 떨어지려 하지만 그것은 전면적으로 떨어진다, 가슴과 머리 모두
    가 떨어진다, 선도 악도 모두다, 성인도 죄인도 모두다, 그것은 통째로
    떨어진다.

    성인도 ‘신성한 것’을 알 수는 없다, 너무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어진 마음이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죄인 역시 그것을 알
    수 없다, 너무나 자신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데다 그 ‘너무 악
    한 마음‘이 걸리적 거리기 때문이다.

    성인도 아니고 죄인도 아닌 자,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자, 무엇
    하나 고르지 않는 자, 자신은 이것이라든가 저것이라든가 하고 주장하
    지 않는 자, 오로지 현존 속에 머무는 자가 ‘신성한 것’을 알 수 있다.

    히말라야로 갈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냥 바위와 함께 있어도 그
    일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사원에 갈 필요는 없다,
    그냥 나무와 함께 있어도 그 일은 일어날 수 있다, 그 나무 가까이 갈
    필요조차 없다.

    그냥 자신과 함께 있어도 그 일은 일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원자가 그것과 함께 파동하고 있다,
    모든 원자가 그것을 축원하고 있다, 모든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
    이다.

    그에 대해서 말하거나 생각하는 만큼
    진리에서 멀리 떨어진다,
    말이나 생각을 그만두는 게 좋다,
    그러면 모를 일 무엇 하나 없다.

    무념이 문이다, 무언이 문이다, 무심이 길이다.
    어떻게 해서 이것을 달성하는가?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대라
    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냥 이것을 들은 것만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
    는다, 왜냐하면 마음이 너무 영리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이것에 대해서 승찬이 말한 것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다,
    마음은 생각하기 시작하고 그 주위에 이론을 읽기 시작한다, 마음은
    말할 것이다, ‘정말 이것은 옳은 것 같구나’.

    하지만 마음이 ‘이것은 옳아 보여’하고 말하면 이미 옆길로 벗어나
    버린 상태에 있는 것이다, 마음은 ‘아냐, 이것을 어려울 것 같아, 불
    가능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을 그만둘 수 있을까?‘하고 말할지도 모른
    다, 그래서 옆길로 벗어나 버리는 것이다.

    마음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면 결코 진리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
    마음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인간은 늘 여행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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