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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섬(좆도) 이야기(개정판)▦유머,엽기 2008. 1. 31. 09:38
신비의 섬(좆도) 이야기(개정판)
조지 시커먼스 (좆꼴리지대, 부교수) 편
I. 서
각종 단행본을 통하여, PC통신을 통하여 혹은 한두장의 카피 본으로 시중에 여러 종류의 좆도 시리즈가 유포되고 있으나 서로 체계와 내용이 달라, 뭇 사람들의 뇌를 혼란케 하고 있어 내 이를 안타까이 여겨 없는 시간을 쪼개어 정리합니다.
좆도의 생활상에 대한 분석은 『색종실록』을 중심으로 국내외 유수한 역사학자, 유물학자, 문화학자, 고고학자들과 함께 좆도를 아끼고 사랑하는 많은 이들에 의해 시도되었으며, 편자는 오직 이들이 연구한 결과를 종합, 정리했을 뿐입니다. 특정 종교나 집단, 회사를 헐뜯기 위한 것이 전혀 아니며 이 삭막한 세상, 다같이 한번 웃어 보자고 한 것이라는 점을 널리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미지의 낙원, “좆도”라는 섬은 조선 세종 때부터 일반인들에게는 물론 관직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환상의 섬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때 여기에서 왕국을 건설했던 색종으로 말미암아 조선시대에는 좆도의 존재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 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사연으로 좆도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차 사라지고 오늘날 섬 전문가들에게조차 생소한 섬이 되었습니다. 최근 『색종실록』이 발견되어 윗입에서 아랫입으로 전달되던 많은 것들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영원히 우리 역사에서 잊어질뻔 했던 좆도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습니다.
『색종실록』에는 주로 1대왕인 색종시대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나 2대왕 박종대왕시대의 초기까지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색종실록』은 좆도의 의식주는 물론 모든 문화가 성적(性的)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주민들은 늘 섹스피아를 꿈꾸면서, 오르가즘을 추구했다고 전해집니다.
끝으로, 이 글의 내용이 기관의 공식견해가 아님을 밝혀두는 바이며, 내용상 있을지도 모르는 오류는 전적으로 편자의 잘못임을 첨언합니다.
Ⅱ. 좆도의 연혁
오늘날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당시 중앙정부가 임명한 만지면/흔들면의 역대 면장들이 한번도 나타나지도 않고 이 섬의 존재조차 몰랐기에 “좆도 모르는 게 면장한다”는 비난 여론이 들끓어 결국 우리나라에서 지방자치를 최초로 태동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바로 그 섬이다.
물론 외국의 지도에는 약간 달리 기록되고 있는데, 1700년대 안개 속에서 부근해역을 헤매다가 좆도와의 갑작스런 조우로 좌초할 뻔했던 미국 국적 제네랄 셔먼(General Sherman)호는 좆도를 조우도(close encounter island)로, 하와이의 다이아몬드 헤드를 닮아 툭 불거진 곶이란 뜻으로 딕 헤드(dick head) 즉, 우리말로는 좆대가리로 명명하고 있다.
Ⅲ. 좆도의 사회제도
1. 정치 및 군사
건국 당시 좆도의 국왕은 색종(Suck King), 왕비는 영국 출신인 벌리자버서(Bulizabeth), 후궁은 또벌리나(Double Lina), 조지존나(George Jhonna), 조세피나(Josephine, 프랑스 출신임) 세명을 두고 있었다. 공주는 박아주리, 박아달라, 좆도베이비(Jhotto Baby)였으며, 후궁이 낳은 공주는 박을년이었다.
왕이 평소에 머무는 곳은 자궁이며 침소로는 유방을 주로 애용하였다. 왕비는 돌림방에서 거처하였으며, 자체 생산되는 두 종류의 거울, 즉 음경(淫鏡)을 매우 좋아하였다 하며 월경(月鏡)은 매월 한번만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왕실의 직통 전화번호는 588-1233(시비삼삼), 588-1288(시비팔팔), 588-1818(시팔시팔)이었다.
좆도 왕국은 일찍이 세계화에 눈을 떠서 능력만 있으면 외국인도 과감히 고위직에 특채하였다 한다. 로마출신 석학으로서 외국어에 달통한 노부랄 조까리우스(Nobural Jokerius)는 왕의 외국인 접견시 통역도 하면서 왕이 피곤할 때 왕비나 후궁을 애무하는 것을 주된 업무로 하는 애무대신을 맡고 있었다.
좆도의 정치체제가 1500년경부터 입헌군주제로 바뀌면서 의회제도가 도입되었으나, 당시 대신들은 요즈음과는 달리 국정감사를 아주 편하게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의원들의 “질문 공세”에 대하여 궁녀들의 질로써 응답케 했다 하는 데 이러한 대응방식을 “질의 응답”이라고 했다 한다.
왕궁의 모습은 『색종실록』뿐만 아니라,『색경』,『좆도왕비열전』등 다수의 사료에서 발견되는데 이를 취합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좆도 왕궁이 붉은 신비의 바다안개에 늘 쌓여 있었다 해서 공식명칭은 자하궁(紫霞宮)이었지만, 약칭 자궁으로 불렸으며, 정문인 옥문에는 자위대(自慰隊)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24시간 내내 성기(性旗)가 나부랑대고 있었다.
궁안에는 두 개의 인공연못, 자지(자池)와 보지(보池)가 있었다. 두 연못을 연결하는 다리는 할랑교와 말랑교가 있었는데 어느해 태풍이 불어 쓰러지자 최신 공법으로 왕복 18차선의 대규모의 다리를 건설, 십팔다리 또는 한자 식으로는 성교(性橋)로 명명하였다. 양 연못에는 좆빼라는 유람선이 한가로이 떠 다녀서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좆도는 평화로운 곳이었기에 공주들을 호위하는 보디가드(구개음화 하면 큰일)인 특수부대 즉 생리대와 정조대를 제외하면, 왕궁의 경호는 상시 근무체제가 아니라 출퇴근 방위로 편성된 자위대(自慰隊)가 담당하고 있었다.
평화롭던 좆도에 외적이 쳐들어와 위기를 맞은 적이 있으나 이 때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구한 두 장군이 있었으니 한 사람은 강간찬이요, 또 한 사람은 윤간이었다. 이후 좆도왕국은 군사훈련을 강화함과 동시에 비밀리에 핵기술을 개발, 국방력을 더욱 강화했다. 당시 이동 전술 핵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전국민의 절반으로 하여금 핵을 상시 보유토록 의무화시켰고 위치가 은폐되어 있는데다가 항상 이동이 가능하여 이웃나라들이 좆도를 감히 넘보지 못했다 한다. 오늘날 군사전문가들은 이것은 음핵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2. 산업 및 경제
천연자원으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원유의 일종인 퍽유(fuck油)와 쪼까유(Joker油)가 조까 생산되었으며 보석으로는 “요실금”과 “좆같은”을 최고로 쳐주었으나, 최고품질의 수정(水晶)인 체외수정과 인공수정, 오팔보다 광채와 크기가 정확하게 두배인 “십팔”이 채광되었는데 특히 질 좋은 철광석인 변강쇠와 껄떡쇠도 채광되었다. 빠구리, 니주구리, 어쭈구리, 말똥구리라는 구리종류의 광석이 많이 나고 있었으며, 구리의 동위원소로서 열받으면 팽창하고 식으면 수축하는 원소기호 10번의 10탱구리와 10쭈구리가 생산되었다.
제조업으로는 폐기물 리싸이클링을 실현함으로써 환경친화적인 산업의 효시가 되었으며 국제특허 출원까지 했던 피혁제품의 생산이 두드러졌다. 병원에서 수술로 잘라낸 그것의 껍질들을 수거해다가 정밀가공, 재봉하여 만들어낸 인피지갑으로서 짐이 많을 때는 이 지갑을 슬슬 주무르면 순식간에 커다란 트렁크로 확대되는 것이었다 다만 수축되면서 물이 질펀하게 나온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한다 이 지갑은 인기가 대단하여 암거래가 성행하였던 바, 정부에 의해 “정액”제가 도입된 최초의 제품이기도 하였다.
이 은행에 대한 일화를 하나 소개하면, 도둑이 은행에 침입, 금고를 애써서 열었는데 요구르트 같은 것 만 있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10병 정도 마시고 나와버렸다. 이튿날 신문에서 “정자은행 털리다”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고 이 도둑이 기절했다 한다.
그리고 좆도의 화폐로는 본디 씹새의 알인 씹알 말린 것이 통용되다가 부패 또는 씹새 멸종의 염려가 있어, 금지시키고 법정화폐로서 정자은행권인 고환을 통용시켰다고 하나, 『색종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야사에만 전해진다.
좆꼴리는 대로가 끝나는 곳에는 그리이스의 아크로폴리스, 콜롯세움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설계, 당시 세계 3대 문화재 중의 하나였던 “아프로 발딱세움”이 그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3. 교통 및 사회
교통수단도 발달하였는데, 가장 보편적인 것은 시팔택시였으며, 젊은이들은 지금의 오토바이와 비슷한 딸딸이(taltari)를 타고 달렸다. 딸딸이가 달릴 때는 “부랄털털 부랄털털”하는 소음이 심해 인근 주민들이 잠을 설쳤다한다. 유층들은 마더퍼 카(mother fucker), 콕서 카(cock sucker)를 즐겨 타고 다녔으며, 한편 기업의 회장들이 애용하던 헬리콥터가 밤중에 지나갈 때면 “박아박아”하는 소음으로 잠자기를 포기했다한다. 가끔은 앰뷸런스가 “지보지보” 소리를 내며 지나갈 때면 학부형들은 교육상 아예 애들의 귀를 틀어막았다 한다.
당시 좆도 사람들은 거시기를 마친 후 떡나무(오늘날은 닥나무로 불리며 펄프의 원료로 쓰임)로 만든 종이의 일종인 클린엑스(Clean X)로 닦아냈는데, 오늘날 미국의 킴벌리(Kimberly)사가 쓰고 있는 클리넥스(Kleenex)상표의 기원이 분명하다고 남녀 영문학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어, 좆도의 세계화의 정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좆도 여성들 사이에서는 서로 상부상조하는 계가 유행했다 하는 데, 보통 5명이하로 계원이 구성되었으며 계원의 숫자와 신체 특정부위의 숫자를 기준으로 계이름을 달리 불렀다 한다.
- 두명일 때는 질투(질two)계
- 세명일 때는 육젖계
- 네명일 때는 젖팔계
유두열계 계원들의 술먹는 방식이 유두주라고 전해지는데, 여성들의 협조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유두주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 하겠다. 탄주 마시는 풍습이 그 때에도 있었는데, 주로 3단계로 이루어졌다 한다. 첫째로 잔을 입에 대어 바로 마시라는 뜻에서 “대보지”, 두 번째는 잔이 비었는가 잔 밑을 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밑(을) 보지”, 마지막으로 다 마셨으면 잔을 돌리라는 의미로 “돌려 보지”가 곧 그것이다.
좆도에서 성 생활이 문란한 것 같으면서도 나름대로 질서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성범죄를 다스리는 독특한 기구 덕이라고 전해진다. 즉, 야만스런 프랑스식 길로틴 대신에 “귀두대”와 “불알까기”(ball breaker)를 가동함으로써 성범죄를 완전 퇴치할 수 있었다 한다.
그러나 왕국의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의 데모는 끊이지 않았다 한다. 어느해 데모가 너무 격렬하여 포졸들이 이들을 체포하려 하자, 학생들은 “좆빠지게” 도망갔다 한다. 이들이 도망간 후에 빠진 거시기들을 수거, 포도청 지하 냉동창고에 보관하였는데, 보관한 후 1주일 이내에 모두 없어져서 담당 직원이 매우 곤혹스러워 했다. 이를 수사한 결과, 포도청 여직원들의 소행으로 드러나, 불문에 부치기로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Ⅳ. 좆도의 문화
1. 종교생활
국교는 불교의 지파인 희열종(喜悅宗)이었는데 동진 시대 백제에 불교를 전파한 마라난타의 사제인 마구할타가 그 계파조사였다. 그가 창건한 절이 그 유명한 월경사(月經寺)이다. 수천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유구하게 서 있는 오층석탑에서 그 영욕의 세월을 간음(가늠)할 수 있다. 월경사에는 1대 주지로서 수음스님이 계셨는데 그 때 7대 고승을 배출한 절로 유명하였다. 발정 색정 몽정 욕정 치정 사정 절정스님이 곧 그 분들이다. 특히 절정스님은 국사로 모셔질 만큼 훌륭한 분이었다 한다.
이들 스님들로 구성된 불교한국당(약칭 불한당)이 백성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어 왕실에서도 이들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는데, 본토의 유학자들이 공리공담과 사색당쟁을 일삼을 때, 좆도에서는 불교 입국이라는 종교적인 목적이기는 하지만 현대적인 당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정치학자들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이수쾅은 그의 역저 『지보유설』에서 1600년대에 병자호란을 겪는 과정에서 좆도에 성교(性敎)가 들어왔다고 쓰고 있다. 성교의 경전인 성경(性經)은 소연세자가 청나라로부터 가져온 성교정도(性敎正道)를 기초로 김대근(金大根)신부가 좆도 문화에 맞게 개작한 것이라 한다.
이 억의 『성교사설』에 의하면, 성교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사람은 아편셀러(Appenseller)였다고 한다. 그는 본디 청나라 홍콩 부두를 무대로 아편 파는 것을 업하던 자로서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조선에 입국하였으나, 박해가 심하자 우선 작은 섬나라부터 전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좆도를 방문하였던 것이다.
넓디 넓은(?) 좆도를 밤세워 뛰어다니며 몸을 아끼지 않는 성교사(性敎使)들의 정성에 반해 많은 신자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조 막달라, 김 말이 등이 곧 그들이다. 특히 좆도 중앙성당에 서있었다는 마리아상은 바로 김 말이의 얼굴을 그대로 본 땄다고 전해진다.
성교사 중에는 비뇨기과 의사이면서 아편셀러와 함께 좆도에 들어왔던 한 서양인이 있었는데, 그는 꼴림 수풀 아래 은밀한 분위기에서 뭔가를 가르쳤다 하는데, 이름도 아예 숲아래(영어로는 Underwood)로 바꾸기까지 했다 한다.
2. 교육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좆꼴리지대(Jot College)와 함께 신학대학인 성감대(聖監大)가 유명하였고 여자대학으로는 씹꼴리지대(Ship Women's College)가 있었다. 좆꼴리지대와 씹꼴리지대는 다윈의 갈라파고스 섬처럼 고립돼 있는 이 섬을 연구하기 위해 공동분교를 설치하였는데 똥물과와 씹물과만을 운영하였다. 신기한 동물과 식물, 광물이 즐비한 이 신비의 섬에서의 연구결과는 다윈이 진화론을 창시할 때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국물학과의 구술학자 펠라치오(Dr. Fellatio) 선생은 입술, 이빨, 혀를 능수 능란하게 구사, 여학생들로부터 아주 인기가 있었으며, 그는 좆도의 구기종목인 육구(sixty-nine 또는 six-nine)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리이스 출신으로서 엉덩이가 유난히 컷던 씹꼴리지대 의과대학 히뿌크다테스(MD. Hippokdates)는 의술을 그야말로 인술로 승화시킨 분으로서 오늘날에도 모든 의사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한편 씹꼴리지대 음악과에는 작곡가로서 요한 시트라우스의 사돈의 팔촌인 요한 시팔라우스가 있었다. 거문고의 대가이면서 작곡가인 박은어선생이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외국인들도 유학 올 정도였다. 유럽에서 온 젊은이는 선생에 대한 존경심이 너무나 깊어 이름까지 아예 바그너로 바꾸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한다.
3. 주민 생활양태
동방예의지국 답게 예의가 발랐는데, 아침에 남정네들이 서로 만나게 되면 “오늘 새벽에도 좆 섭디까?”라고 물으면 “좆 섭니다” 인사로 답했다 하며, 이것이 오늘날 기분이 좋을 때 쓰는 표현인 “좋습니다”의 어원이 되고 있다고 국어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겨울철에는 눈이 많이 내려 스키인구가 엄청났다 하며, 스키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시발스키”, 개경주용인 “개놈의 스키”, 2인승인 “쌍놈의 스키” 그리고 10인승인 “씹스키”가 있었다.
사회가 안정되고 산업이 번창하면서, 박종대왕(The Great Fuck King)은 갱제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하여 강간산업을 국책사업으로 삼아 질을 넓히고 위락시설을 포함한 대규모의 투자를 시행하게 되었다.
굴곡이 많은 해안선을 따라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보다 더 아름답게 조성된 해수욕장이 바로 선오브 비치이다. 이 해안선에 있는 유명한 별장이 펜트하우스, 옐로우하우스이며, 콘돔 방식으로 운영되어 오늘날 콘도의 원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별장 근처인 니주가리 바닷가 배위에 빠가 있었으니 바로 씹빠(ship bar)였다. 이 빠에 유명한 외국인 혼성 듀엣이 있었는데... 남자가수는 ”좆 내논“, 여자가수는 ”젖 내논“.... 남자가수는 요절하여 팬들의 슬픔이 너무나 컸다고 전해지는데, 금번 발견된 『색종실록』에는 사관의 눈물 자욱이 몇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선명하게 남아있다.
좆도 부부들의 이혼율 또한 상당한데, 이혼 사유는 성격 차이, 박력 부족, 내조부족라는 세 가지로 분류되었다 한다. 첫째 사유는 부부 공히 주장하는 것인데, 겉으로는 성격차이라 하지만, 실상은 “성기 규격의 차이”를 일컫는 말이라고 전해진다. 둘째 사유는 흔히 부인들이 주장하는 것으로서 “박는 힘이 없어서...”라는 의미이며, 셋째 사유는 흔히 남편들이 주장하는 것인데 “안으로조으는 힘이 부족해서...”라는 뜻이었다 한다.
Ⅴ. 좆도의 생태계
전설로만 전해 오던 인어 두 마리가 살고있었는데, 형태가 전혀 달랐다 한다. 위가 사람이고 밑은 물고기인 인어는 머리카락이 너무나 이뻐 어부들은 “빨아주”(髮娥珠)라 불렀고, 그 반대 형태인 인어는 공주의 이름을 따서 “박아주”(搏娥珠)라 불렀다. 포획이 금지되어 있어, 어망에 인어가 걸릴 경우 어부들이 용도를 정확히 구분, 사용하고는 즉시 방생하였다고 전약용이 지은 『좆도어보』에 기록되고 있다.
한편 한반도에선 멸종된 과하마의 변종으로서 야생하는 조까지마가 우글거렸고 좆도 고유의 젖소품종인 조까라우가 사육되었는데 야생 호랑이인 강간범과 유괴범이 출몰, 이들을 잡아먹어 당국에서는 골치아파했다 한다.
씹새와 좆까치는 아침마다 유방암과 자궁암, 최불암이라는 넓은 바위에 앉아 지저귀는데..... 그 우는 소리가 너무나 애절하여 듣는 이들의 가슴을 저미는 것 같았으며, 당국에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 사냥을 금지시켰다 한다. 특히 씹새는 먹이를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였으며, 자생하는 “귀두”라미를 최고의 먹이로 쳤다. 씹새의 알은 씹알로서 달걀보다 10배의 영양식으로 너무나 맛있어 밀엽이 횡행했다 한다.
그 힘센 씹새도 천적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보지냄 새”라는 희한한 냄새를 풍기는 새가 나타나면 울기는 커녕 숨도 못 쉬고 움츠려 있었다 한다. 이 무서운 새와 공생관계에 있다고 알려지고 있는 닭과에 속하는 조류가 있었는데, “혀빠닭”(Tung Chicken)이 바로 그것이다.
별도의 둥지가 없이 밤만 되면 그 새의 은밀한 곳에서 머물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무슨 짓을 하는지 본 사람이 없다 한다.
뻐꾸기도 많이 서식하고 있었는데, 우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한다. 숫뻐꾸기가 “벗고 벗고”라고 애절하게 울면, 암뻐꾸기는 “박고 박고”라고 슬피 울어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전해진다.
좆도에는 동물농장이 있었는데, 동물들도 사람을 닮아 너무나 그것을 밝혔다고 전해진다. 이 농장의 암탉들이 새벽에 울면서 “꼭끼워 꼭 꼭 꼭 ”라고 외쳐댔는데, 장닭들은 “꽉조아 꽉조아”라고 화답했다 한다. 소는 “음모-- 음모--”라고 놀렸으며, 날아가는 제비들도 질투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면서 “자지배배--자지배배”라고 울었다 한다.
이들이 운우의 정(雲雨之情)을 나누고 절정에 이르렀을 때 참새와 쥐들은 “찌익 찌익”이라고 울어대고 염소들은 “빼---빼---”라고 신경질적으로 우는 한편, 딱따구리는 “다까 다까(닦아 닦아)”라는 소리를 내며 나무를 파고있었다 한다. 아침마다 벌어지는 이러한 소란은 『세계강간기구』안내서에 강간명물로 소개될 정도였다.
식물로는 나리과의 희귀식물인 좆나리가 좆도 전역에서 자생하였고 옷감을 짜기 위해 누에를 치는데 필요했던 니미뽕도 번성했으나 오늘날에는 수입종인 나이롱뽕에 의해 도태되었다 한다.
Ⅵ. 좆도의 멸망 및 후기
1800년대에 조지 안서(George Anthur)를 두목으로 환관들이 난을 일으켰다가 강간찬 장군과 윤간 장군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환관의 난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양 장군의 무술이 워낙 출중한 점도 있지만, 사학자들은 실패의주된 이유로 다음 네가지를 들고 있다.
- 첫째, 단체를 조직할 발기인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 둘째, 조직의 기본인 정관이 없었다.
- 셋째, 수없는 난관을 극복할 힘이 없었다.
- 넷째, 어려운 일이 있을 때도 사정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번성하던 왕국이 이때부터 쇠락의 길을 치닫게 되었으며, 색종·박종시대의 태평성대를 잊지못하는 국민들은 이 사태를 쿠데타로 규정, 극도의 불신감을 보냈다 한다. 『좆도잡록』은 양 장군이 국민들로부터 불신을 받는 가운데 서로 반목 시기하다가 좆돼버렸다고 적고 있는데, 어느날 하의가 벗겨지고 거시기가 잘린 채 존내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것이다.
그 이후 구한 말엽쯤 좆도에는 이름 모를 괴질이 만연하였다. “좆까라 마이신”과 “좆도 마이신”이라는 세계 최강의 항생제를 투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괴질을 퇴치하지 못하여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더니 급기야는 무인도로 되어 오늘날의 독도로 남게되었다 현대의 발달된 의학으로 이 괴질의 정체를 규명해 본즉 간질의 일종인 용두질(hard and severe masterbation)로 판명되었다.
* 참 고 문 헌 *
경상도지리지 좆도편, 좆도 및 씹도 애무성,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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