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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에 있는 왕궁의 유적지로 가는 시기리야 록 절벽 길의 좁은 통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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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론나루와 유적지의 돌기둥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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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론나루와 유적지 안에 있는 ‘갈 비하라’의 부처님 열반상(오른쪽)과 제자 아난의 석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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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누라다푸라의 한 사원 안에서 야자 기름불을 밝히며 기원하는 신도들. |
‘인도양의 진주’라고 부르기도 하고 ‘인도 대륙의 눈물’이라고도 불리는 섬나라 스리랑카. 이곳은 기원전 236년에 인도 아쇼카왕의 아들 마힌다에 의해 불교가 전해지면서 찬란한 문화가 피어나기 시작해 오늘날까지 화려하고 엄청난 규모의 문화유산이 도처에 살아 숨쉬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아누라다푸라, 폴론나루와, 누와라(캔디)를 잇는 일대에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유적이 몰려있어 이 지역을 ‘문화삼각지대’라 부른다.
아누라다푸라는 2500년 전 스리랑카 최대의 도시였다. 그것을 기억하듯 거리 곳곳에 하늘을 향해 장대한 모습으로 탑들이 솟아 있고, 수많은 조각은 부처의 미소처럼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이곳에서 기반을 다진, 우리가 흔히 소승불교라 말하는 상좌부 불교는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 등으로 퍼져갔다. 하지만 남인도에서 쳐들어온 침입자와의 거듭된 전쟁 끝에 1400여년에 걸친 영화(榮華)의 막을 내리게 된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지난날의 영광을 느끼는 데 부족함이 없다. 아누라다푸라의 유적지를 둘러보지 않고서는 스리랑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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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부처상이 서 있는 폴론나루와의 ‘랑카 틸라카’. |
아누라다푸라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스리랑카에 최초로 불교가 전래된 성지 미힌탈레가 있다. 1934년 정글 속에서 잠자고 있던 유적군이 발굴된 이래 스리랑카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의 하나로 여겨지며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석양녘에 기도하기 위해 오르는 수많은 사람 사이에 끼어 산정(山頂)의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서서 광활하게 펼쳐지는 불국(佛國)의 땅을 바라볼 때의 기분은 두고두고 잊지 못하게 한다.
10세기 말에서 11세기에 걸쳐 남인도의 쵸라 왕조가 대군을 보내 신할라 왕조의 수도인 아누라다푸라를 정복하자 신할라 왕조는 수도를 폴론나루와로 옮겼다. 이때부터 폴론나루와 시대가 열리고 타이나 미얀마 등에서 승려들이 찾아올 만큼 이곳은 불교도시로서 스리랑카 불교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정글 곳곳에 폐허로 남은 왕궁이나 거대한 불탑, 불상이 그때를 짐작케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폴론나루와 시대도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13세기 후반에 다시 인도 쵸라 왕조의 침략을 받아 섬의 중앙부로 쫓겨가게 되고 폴론나루와의 영광은 정글 속에 묻혔다.
부처님 치아 사리 모셔
문화삼각지대에서 가장 독특한 곳은 시기리야에 있는 거대한 바위산 요새 ‘시기리야 록’이다. 주위의 숲과 상당히 대조적인 적갈색의 이 바위산은 높이가 195m로, 하늘을 향해 거의 수직으로 솟아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5세기 중엽 바위산 꼭대기에 화려한 왕궁을 짓고 살았던 왕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억지로 왕좌에 오른 카샤파 왕자는 동생 목갈라나의 보복이 두려워 이곳에 성을 쌓았다. 경사가 급한 바위를 사자 발톱 모양의 돌계단을 거쳐 거의 기다시피 하며 산 꼭대기에 올라서면 옛 궁궐의 허망한 흔적이 세월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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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불탑이 보이는 폴론나루와 유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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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분위기를 돋우어 주는 아누라다푸라. |
문화삼각지대의 종점이며, 스리랑카 마지막 왕조의 도읍이라 할 수 있는 누와라는 ‘도시’라는 뜻인데 지금은 ‘캔디’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영국 식민지 시대의 아픔이 배어있는 곳이다. 19세기에 누와라가 영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스리랑카 사람들은 식민지배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스리랑카 지배를 시작한 영국은 스리랑카의 종교나 전통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특히 영어로 지명을 많이 바꾸었는데 식민지 시절 전까지 수도였던 누와라를 캔디로 바꾼 것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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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캔디의 불치사 안에 있는 불교학당. |
누와라에는 식민지 세월을 당당하게 이겨낸 ‘달라다말리가와’라는 사원이 있다. 일명 불치사(佛齒寺)라 불리는 이 절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의 치아 사리를 모셔놓은 곳이다. 4세기에 인도 오릿사의 칼링가로부터 전해진 석가모니의 치아는 스리랑카의 왕조가 도읍을 바꿀 때마다 함께 옮겨다녔다. 불치를 유달리 귀하게 생각하는 스리랑카 사람들은 이곳 참배에 각별한 정성을 기울인다.
스리랑카에서는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움직이는 여정에 따라야 한다. 이 여정은 스스로의 발견을 위한 것이고 삶을 찾는 길이다. 곳곳에 스며있는 상좌부 불교의 자취. 그리고 가냘퍼 보이지만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꿋꿋이 지켜온 문화. 그 모든 문화의 향기를 듬뿍 담아 스리랑카는 찾아오는 손님을 반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