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사진은 60년전 8월 15일 조국이 일제로 부터 해방돼
서울 시민들이 남산 국기게양대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하는 장면
일왕(日王) 히로히토가 45년 8월15일 정오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미영중소 연합군에게 항복을 발표하자 서울 광화문 네거리으로 나와 환호하는 서울 시민들의 모습.
무조건 항복한다는 일왕의 육성방송을 듣고 있는 서울의 일본인들. (1945년 8월15일)
8.15 조국 해방은 옥중 독립투사들에게 더욱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사진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 나와 해방 만세를 외치는 출옥 애국인사들과 이를 환영하는 시민들의 모습이다. (1945년 8월15일)
조국의 해방을 환호하는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의 인파 - 만나는 이마다 서로 부둥켜 안고 목이 터져라 해방 만세를 외치면서 밤이 되어도 흩어질 줄을 몰랐다.
1945년 광복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축하하기 위해 전남 광양 서국민학교 교정에 모인 군민들. (1945년 8월15일)
전남 광주에서의 8.15해방 경축 퍼레이드.
1945년 8월15일 美, 英, 佛, 蘇 등 전승국 언론들과 미국에서 발간되던 독립신문은 日帝로부터의 한국 해방을 `테러와 억압에 대한 승리`로 보도하면서 앞으로의 향방에 대한 분석기사까지 곁들였다.
전국에 메아리진 해방의 기쁨 - 조국해방은 방방곡곡 어디라 할 것 없이 기쁨과 감격의 물결을 이루게 했다. 사진은 1945년 8월16일 전남 광양읍 목성리에서 주민들이 해방을 축하하며 환호하고 있는 모습이다. (李坰謨씨 제공)
시민환영 받는 몽양 여운형 선생 - 45년8월16일 휘문고 교정에서 연설하기에 앞서 시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는 몽양(앞쪽 가운데).
몽양 여운형(呂運亨) 1945년8월16일 해방직후, 휘문학교에서 해방의 기쁨을 전하는 여운형.
몽양 여운형(呂運亨) 1945년8월16일 해방직후 휘문고보 교정에서 연설하는 몽양.
백범 김구선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환국 .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경을 떠나는 김구일행.
왼쪽으로부터 이청천장군. 안미생(김구선생의 자부) 김구, 그리고 그뒤에 윤경빈.
임시 정부 귀국 환영 꽃전차.
36년간의 광복을 맞은 임시정부의 김구주석이 감격어린 표정으로 귀국, 동포의 뜨거운 영접을 받았다.
임정귀국 축하행진 - 임시정부의 귀국을 맞아 서울시내 곳곳엔 환영아치가 세워졌고
학생들의 축하 시가행진도 잇달으면서 임정에 대한 국민적 여망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갔다.
조국으로 돌아온 임정요인들 - 왼쪽 세번째가 법무위원이었던 이시영,
다음이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외무부장 조소앙, 내무부장 신익희 순이다.
총독부 광장의 게양대에서 일장기가 내려지고 있다.(1945년 9월9일)
조선총독이 주한미군사령관에게 항복한 직후인 1945년 9월9일 오후 철수하고 있는 일본군.
해방후 국민학교 첫개교 - 해방 약 한달 뒤인 1945년 9월24일 전국에서 국민학교 교육이 일제히 시작되어 빼앗겼던 우리말 우리글을 가르치는 감격을 맛보았다. 사진은 첫 수업.
해방 직후의 시골 국민학교 교실 - 진흙 화로 둘레에 배치한 간이 책상에 옹기종이 모여앉아 진지한 얼굴로 되찾은 우리 글을 익히고 있다. 사진은 강원도의 한 산골.
해방경축 종합경기대회 - 1945년 10월27일에 열린 이 대회는 해방후의 첫 전국체전으로 태극기를 든 손기정씨가 감격에 벅차 눈물을 닦고 있다.
1946년 8월15일 광주에서의 해방1주년 기념행사 (우리나라 최초의 천연색 사진, 이경모씨 촬영)
해안경비대의 해방경축행진 - 창설 당시 3백명에 불과했던 경비대가 대원 1000여명의 해안경비대로 발전, 해방1주년 경축행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1946년 8월1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