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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와 제사
    #佛敎 2008. 5. 15. 07:03


     

    ◆ (1) 우리들이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칠칠재, 사십구재, 백일재, 1주기 제사, 2주기 제사)

     

    사람의 한평생이란 어차피 슬품과 괴로움이 기뿜과 줄거움보다는 많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우리 인생을 고해(고로움의 바다)라고 하셨습니다. 파도가 넘실대는 망망대해를 가는 데는 많은 고통과 슬픔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보다 더 슬프고 괴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일시적으로 잠깐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삶과 죽음의 서로 다른 길에서 헤어지는 아품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따를 것입니다.

    참으로 애통한 이 일이  우리 인간 세상에서는 한시도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듣고, 말하고,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던 사람이, 아무런 말씀도 없고, 더우기 그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고, 따사로운 그 음성도 들을 길이 없으니 참으로 인생이 무상함을 느낍니다.

    아무리 세상의 삶이 고달프고 괴롭다고 하더라도 사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이 모든 생명체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본능과는 상관없이 모든 것이 인연이 다 하면 사라져 버릴까요?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인데, 인간의 삶과 죽음이 과연 무엇인데 그 동안 정이 들대로 들은 모든 것과 헤어져 가야만 할까요?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

    "인생이란 어디로부터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태어남은 마치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나는 것* 죽음 역시 한 조각 뜬 구름이 사라지는것*."

    옛 성인들께서는 우리 인생을 저 높은 하늘에 떠다니는 한 조각 뜬 구름에 비유하기도 하고,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간다고 해서 공수래 공수거 라고 하기도 했는데, 정말 인생이란 마치 뜬 구름처럼 허망한 것일까요?

    인생이 과연 뜬구름처럼 허망하기만 하다면 우리는 오늘날 살아가는 의미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은 우리에게는 부처님께 의지하여 부처님의 가피를 입을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운자체본무실* 생사거래역여연* 독유일물상독로* 담연불수어생사*>★

    "뜬 구름이란 실체가 없는 것으로, 인생이 나고 죽는 것도 이 뜬구름처럼 실체가 없다." 그러나 "오직 한 물건" 이 있어서 생사에 관계없이 고요하고 항상 홀로 뚜렷하다."

    무상하고 허무하고 나고 죽는 이 인생살이 속에서, 유일하게 태어남도 없고 영원히 죽지 않는 신령스런운 한 물건이 있습니다. 이 한 물건이 출생이란 옷을 입고 나들이를 나갔다가 사망이라는 옷으로 갈아 입고 또 다른 마을로 나들이 가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범부중생의 눈에는 슬픔과 기쁨이 엇갈리는 생,사(삶과 죽음)으로 보이는것입니다.

    원래 진실된 근본에서 보면 인생이란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이런 진실한 도리를 바로 알게 되면 삶과 죽음은 나들이 갈 때 갈아입는 외출복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도 않고 삶에 집착하지도 않게 되어 그야말로 생사(삶과 죽음)에 걸림이 없는 참으로 대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인연따라 태어나고 인연이 다하면 죽지만, "오직 한 물건, 우리의 주인공,"은 보고, 듣고, 말하며, 이 육체를 운전하고 다니지만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신령스러운 오직 한 물건, 우리의 주인공은 비유하면 달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밤하늘에 두둥실 떠서 밤길을 환희 밝히던 밝은 보름달은 아침이 되어 태양이 떠오르면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달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지구의 반대쪽에서 달은 여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사(삶과 죽음)는 바로 이 달이 뜨고 지는 현상과 같고, 우리의 본래 주인공은 비유해 보면 달과도 같아서 죽는다고 하여도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불교의 기본 사상이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인연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연이란 인과 연이 만나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연은 단지 금생만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처럼 인연 따라서 삼세에 걸쳐서 이어지는 현상을 "윤회"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윤회"란 태어났다가 죽고 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면서 천상* 인간*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여섯 갈래의 몸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다람쥐가 체바퀴 안에서 빙글빙글 돌듯이 이 여섯 갈래의 길을 한없이 돌아 다니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이처럼 6도를 수 없이 왕래해 온 것인데, 금생에는 다행스럽게도 인간으로 태어났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중생이 이와 같이 6도를 윤회하는 것은 "업력" 에 의합니다. 성한 행위를 하면 그 결과 선한 과보를 가져오고, 악한 행위를 하면 괴로운 결과가 찾아 오는데, 그러한 결과를 낳게 하는 힘이 "업력"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는 육신은 모두 흩어져서 지* 수* 화* 풍의 기본 요소로 돌아가 버리지만, 자기가 뿌리고 거두는 이 "업력"만은 흩어지지 않고 업에 따라 다시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구사론>이라는 대장경 속에서 찾아 살펴 보면 우리 중생들이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미혹의 세계를 윤회하는 과정에 4가지 단계가 있는데, 그것을 사유(四有)라고 합니다.

    *즉* 생유(生有) * 본유(本有) * 사유(死有) * 중유(中有)라고 하는 네 과정을 거치면서 윤회한다.

    <생유>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찰라, 즉 어머니의 태속에 수정되는 순간을 말하고.

    <본유>는 생을 받은 뒤 죽을 때까지의 생존 기간을 말하고.

    <사유>는 죽는 순간을 말하고.

    <중유>는 임종해서 다음의 생을 받을 때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 사유설(四有設)에 의하면 우리 인간이 목숨을 마치면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중유>때 중음의 몸을 갖게 되는데, 실제로는 몸뚱이는 없고, 오직 영신(신령스러운 알음알이)만이 남아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대개 이 중유는 다음 생에 태어나기까지의 7.7일 동안의 기간에만 존재하는데, 아주 선하거나 아주 악한 사람은 죽은 즉시 곧바로 다음 생을 받기 때문에 중음의 몸을 받지 않지만, 대부분 보통의 영은 중음으로 있는 동안에 다음 생이 결정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7 일간 일곱번 되풀이 하는 동안 거의 대부분 새로운 인연을 따라 태어나지만 때로는 49일을 넘기고도 다음 생을 얻지 못해서 "중음신" 으로 남아 허공 가운데 머무는 수가 있는데, 이 경우는 이 세상에 대한 애착심* 집착심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모두 이 몸과의 인연이 다하여 떠날 수 밖에 없는 순간이 오는데 우리가 금생의 인연이 다한후에 좋은 곳에 태어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살아 생전에 많은 선업을 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인연이 다하여 다음 생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어떻게 선업을 닦을 수 있겠습니까? 생전에 누구 못지 않게 선업을 닦았다고 할지라도 떠나가는 마직막 순간에 마음 한 번 잘못 먹음으로 인해서 악도에 나는 일도 많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母윱歐??

    그와 같은 걱정만을 하지 않아도 됩??.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자상하시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기 자신의 힘과 유가족의 지극정성으로 좋은 곳에 가서 태어날 수 있다고 아주 소상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 이 세상을 떠나려고 하는 이는 이제 세상의 모든 인연을 잊어버리고 오직 일념으로 아미타불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습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아무리 죄업이 두터운 중생일지라도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오직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염하면 모두 극락세계로 맞아들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부디 돌아가시려고 하는 이는 모든 애착을 버리고 아미타불만을 일념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인로왕보살님의 인도를 받아 기필코 극락왕생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 어느 곳에 계실까? 한시도 잊지 않고 마음 속 깊이 간직하며, 생각하고 생각해도 더 생각할 수 없는 곳에 이르면  바로 그 곳에 아미타불이 계시느니라.>

     

    둘째: 이 세상을 떠나시는 분이 생전에 누구 못지 않게 선업을 닦으셔서 자력으로도 능히 극락왕생하리라고 믿을 수도 있지만, 떠나는 마직막 순간에 마음 한 번 잘못 먹으면 악도에 나는 일이 있습니다.그것을 어찌 그 누가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남은 유가족이 자식된 도리로서 행여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지극정성된 효도심으로 법석을 마련하고 극락왕생하는 <재(齋)>를 모셔야 합니다.

    돌아가신 후 매번 일주일마다 재를 올려야 하는데, 그것을 칠칠재(七七齋)라고 합니다. 첫 주부터 6주까지는 6,7재라 하고, 마직막 7주째를 사십구재(四十九齋)라고 합니다.

    살아 생전에 지은 업력으로 다음 생이 결정 된다는데, 우리 남은 유가족들이 재를 지낸다고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겠는가? 하고 의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의심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어 왔습니다. 미린다 라는 왕과 "나선비구" 사이의 문답을 기록한 <미린다왕문경>에는 이 의문에 대한 바른 해답이 있습니다.

    "미린다 라는 왕이 나선비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 있으면서 일백년이나 악을 행한 사람이라도 임종시에 지극정성 일념으로 염불을 하면 죽은 후에 천상에 태어난다고 했는데, 나는 이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자 나선비구는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조약돌이라도 물 위에 놓으면 가라 앉습니다. 그러나 일백개의 돌이라도 배위에 올려 놓으면 가라앉지 않고 뜹니다. 염불의 수행은 바로 일백개의 돌을 뜨게 하는 배와 같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위신력은 마치 배와 같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위신력은 마치 배와 같아서 죄업이 두터워 악도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중생이라도 능히 악도에서 구제 하는 것입니다." 

    또한, <목련존자가 부처님께 귀의한 후 신통력으로 돌아가신 어머님 계신 곳을 알아보니 지옥에 계셨습니다. 목련존자는 부처님께 이 사정을 말씀드리고 좋은 곳에 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청하였을때, 부처님께서는 지극정성 삼보님께 공양하고, 선업을 쌓으면 어머님이 그 공덕으로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한 내용이 <목련경>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지장경>에 보면 <부처님이시여, 악을 익힌 중생은 아주 작은 일에서도 한량없는 죄를 저지릅니다. 이런 악습이 있는 중생들이 임종할 때에 그 남.녀권속들이 마땅히 그를 위해 복을 닦아 앞길을 도와주되, 번(장엄)을 달고, 등불을 밝히고, 을 읽어주고, 불상을 공경하며, 부처님을 염하되 한 분의 부처님 명호를 한번 부르더라도 임종하는 사람의 귀에 들리게 하고, 임종하는 사람의 마음에 닿게 하면, 그런 중생들이 지은 악업으로서는 반드시 나쁜 곳에 떨어질 것이로되, 그 남.녀권속들이 임종하는 사람을 위해 성스러운 인연(因緣을 닦았으므로 그러한 모든 죄가 다 소멸되옵니다.  

    만약 그가 죽은 뒤 칠칠재(사십구일재) 안에 다시 여러가지 좋은 공덕을 지어 주면, 능히 그 중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나쁜 곳을 여의게 하고,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 아주 묘한 낙을 받게하며, 현재의 남. 녀권속들도 아울러 이익이 한량없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자리를 마련하여 부처님께 지극정성 재를 올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피를 힘입어 두터운 업장을 소멸하고 좋은 곳에 테어나도록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재를 올리는 것은 죽음을 슬퍼하고 돌아가신 영가를 위로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영가로 하여금 부처님께서 밝혀주신 이 생사윤회의 실상을 올바로 깨달아 생사윤회의 굴레를 끊어 버리고, 영원한 삶을 성취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세상 인연이 다한 것을 슬퍼만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가다듬어 돌아가신 영가에 대한 애통한 마음을 잠시 걷우어서 "부처님의 말씀" "진리의 가르침."을 잘 받아 들여서, 생사의 슬픔을 벗어나게 해 드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극정성 재(齋)를 올려야 할 것입니다.

    "*생자필멸* 회자정리+" 라는 말이 있듯이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음이 뒤따르고 서로 만난 사람들도 반드시 헤어지는 것이 이 세상의 어길 수 없는 법칙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문에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원래 생, 사(삶과, 죽음)가 없습니다. 비록 오늘 이승을 하직하는 영가라도 "또 다른 삶" 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많았던 이 사바세계를 떠나 근심과 고통이 없는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면 오히려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남은 권속들은 영가께서 아무 미련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승을 떠나시도록 슬픔을 걷두어야 할 것입니다. 너무 슬퍼하고 아쉬워 하면 오히려 영가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고,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지 못해 다음 생을 받지 못하고 허공 속에서 방황하는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애통해 하는 것은 돌아가신 영가를 위해 옳은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돌아가신 영가의 유훈을 잘 받드는 사후효행에 힘쓰는 것입니다.

    살아 생전에 못다한 효도를 후희만 하는 데 그쳐서는 안되고, 사후에도 지극한 정성으로 효도하는 것이 자손의 도리입니다. 돌아가신 분의 유혼을 충실히 지키는 것도 사후 효행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바람직스러운 효행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여 그 공덕의 힘으로 돌아가신 영가가 좋은 세계로 가서 태어날 수 있도록 <齋>를 올리는 것입니다. 아울러 선업을 쌓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공덕을 영가에게 회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남아있는 유족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사후 효도를 합시다.>

    <지극정성 재(齋)를 올립시다.

    <선업을 쌓읍시다.>

    <돌아가신 영가가 그 공덕으로 극락세계에 가서 나기를 간절히 기원합시다.>

    <칠칠재를 지냅시다.>

    <사십구재를 지냅시다.>

    <백일재를 지냅시다.>

    <1주기를 지냅시다.>

    <2주기를 지냅시다.>

    <제사를 지냅시다.>

    <천도재를 지극정성으로 지냅시다.>

    <참다운 사후 효행에 힘씁시다.>

     

    ◆ (2) 올바른 제사법에 대해 알아 보자구요? ◆

     

    돌아가신 분이 극락정토에 왕생 하도록 기원하는 의식은 대개 천수경* 반야심경* 무상게* 장엄염불* 금강경* 아미타경* 삼귀의* 등을 독송하고,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합니다.

    경의 말씀을 살편보면 *거짓된 자기* 를 버리고 *참된 자기* 를 깨달으라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아미타불께 의지하여 극락에 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아미타* 란 원래 *무량수,무량광* 으로 번역되니 *영원한 생명* 이란 뜻입니다. 

    돌아가신 영가가 자신의 참 생명은 무량한 것임을 알고, 물거품같은 일시적인 육체에 얽매이지 말고, 본래의 부처님 생명으로 돌아가 평안한 경지를 얻도록 인도하는 것이 장례, 제사의 진정한 뜻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 형식에 치우쳐 본래의 뜻을 상실한 경우도 있습니다. 무조건 오래 염불해야 좋은 줄 알고 있는데, "지극한 정성" 이 깃들어 있지 않으면 영가에 감응키 어려워 별 효과가 없게 됩니다. 단 한 시간을 하더라도 "온 정성을 다하여 염불" 해야만 비로소 의식의 효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영가에게만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가족들도 또한 마음을 평화롭게 해야 합니다.  가족들에게 영가가 실로 죽은 것이 아니며, 우리 모두가 영원히 죽을 수 없는 "불성을 갖춘 인간" 이란 진리를 깨우쳐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 일반적으로 영가와 가족은 가장 정신적인 상태가 비슷해서 가족의 마음이 고요하면 영가의 상태도 편안해지기 때문입니다.

    영가는 오히려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영계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가족들이 강한 집착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에 영가의 가는 길에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생전에 바라던 장례의식이 행해지지 않아 섭섭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장례와 제사는 영가를 위한 예식이므로 영가의 생전의 심정을 헤아려 잘 모셔야 합니다. 예로부터 조상 잘 모셔서 집안이 잘못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개인생명이 아니라  "한 집안의 생명" * "민족의 생명" * "전체의 생명"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출가 수행을 잘해서 도인이 되면 9족이 제도 받는다고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조상의 피가 흐르며 * 조상의 얼이 * 이어져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인타라망" 의 비유에서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무한한 그물의 한 코처럼 무수한 인연에 의해 존재 합니다 그래서 조상들과도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고 있으니,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없는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인연과 조건을 개선하지 않고는 나의 향상과 행복은 얻기 어렵습니다.

    ★ 불자님들이여, 지극한 정성으로 제사를 모십시다.! ★

     

    ◆ (3) 49 재를 지내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

     

    49 재라는것은 죽은지 49일만에 지내는 재 라하여 그렇게 부르는 것인데,

    재(齋)라는 말은 불교에서 기도나 불공을 드릴때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 주변 환경을 깨끗이 하고  ◎ 몸을 깨끗이 하고   ◎ 마음을 깨끗이하여 오로지 정성되게 하는 것을 (재계)라 하고 간단히 (재)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는 불자라면 언제든지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이며, 복된 생활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중생들은 각자 자기가 지은 업의 힘으로 인해 끊임없이 나고 죽음을 계속하는데 이것을 윤회 전생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윤회하는 주체는 중생의 안에 각자 간직되어 있는 선악의 종자이지만, 그 윤회하는 객관적인 세계 육도를 윤회전생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나고 죽는 형태를 보통 생유 * 본유 * 사유 * 중유등 네 가지로 설명하는데 ☆ 유 는 "존재" 란 뜻입니다.

    ◎<생유>란 출생하는 순간을 말하며,

    ◎<사유>는 죽는 순간을 말합니다.

    ◎<본유>는 태어나면서 죽는 순간까지

    ◎<중유>는 사유에서 생유까지로써

    중생이 죽어서 내생에 다른 몸으로 태어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중생이 존재하는 네 가지 형태 중에서 다른 것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현상이지만, 중유의 기간이 얼마일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본유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업에 따라 일정하지 않습니다. 만일 선,악 간에 그 업이 세력이 강하면 중유의 기간이 짧고 , 길더라도 49 일을 넘지 않는 다고 합니다. 즉 사람이나 그 밖의 모든 중생들은 죽은 뒤 49일 안에는 새로운 연을 만나서 다른 중생의 몸을 받아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죽은 이의 명복을 빌어, 좋은 세계에 더좋은 몸을 받아 태어나도록 중유가 끝나는 49일째 되는 날 재를 올려 천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49일째 되는날 하는 49 재는 부처님께 고양하고 돌아가신 이에게 경전을 읽어 줌으로써 망령이 지혜의 눈이 열려 좋은 곳으로 왕생하도록 기원하는 지극정성의 천도재를 말합니다. 또한

    유족들은 49일 기간 동안과 49 재를 지내는 동안은 근신하고 몸과 마음을 삼가하며, 고인을 위해 선행을 하고 공덕을 지어 지극한 정성으로 해야 됩니다.

    <자장보살본원경>에는 "만약 능히 죽은 후 7일 안에 여러 가지 선을 행하면 많은 중생으로 하여금 악취를 떠나 인간과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가령 생전에 악행을 쌓았다 하여도 죽은 후에 그 유족이 49일 안에 선행과 보시를 하게 되면 고인은 그 공덕에 의하여 천상계의 낙을 받고 그 유족들도 함께 공덕을 받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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